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시몬은 열혈당원으로 불렸고 유다는 그리스도의 형제로 여겨집니다.
열혈당원은 당시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무장세력이었습니다.
『하.사.시.』에 의하면 시몬은 독립운동을 하다 나병에 걸렸고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며, 유다는 야고보와 함께 알페오의 아들들로 불리며 예수님의 사촌 형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신 다음 그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시고
당신이 복음을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십니다.
나중에 파견도 하시지만, 오늘 복음만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한 부르심’, 곧 ‘소명’(召命)에 대한 참다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명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도록 맡겨주신 일일까요? 아닙니다.
소명의 뜻은 “생명을 요구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냥 나의 존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언가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는 ‘사명’(使命)이라고 합니다.
만약 소명과 사명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큰일이 벌어집니다.
가리옷 유다 같은 사도가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소명의 의미를 사명과 헛갈린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주님께 무언가 해 드리려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아마 세속적인 것에 밝아서 예수님께서 돈주머니를 맡기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그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점점 자기식으로 주님을 섬기려 했고 결국엔 주님을 팔아넘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명에 집중하는 사람은 ‘업적 주의자’가 되어 눈에 보이는 일을 해내지 않으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깁니다.
“선생님 제가 물 위를 걸어 갠지스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수행자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라마크리슈나’를 찾아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높아진 도력을 자찬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있던 라마크리슈나가 물었습니다.
“그래, 몇 년이나 수련했는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스승은 다시 물었습니다.
“이보게, 갠지스강을 건너는 데 뱃삯이 얼마인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루피라고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라마크리슈나가 수행자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이나 수행해서 겨우 18루피를 벌었네.”
이것이 소명이 아닌 사명에만 집중하는 제자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명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를 증명하며 삽니다.
그리고 증명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어떤 목사님이 1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하여 사목하였는데도 신도가 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절망에 빠져 십자가 앞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는 실패한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실패한 것이다.”
그 목사님은 “제가 실패한 건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실패한 것이다. 만약 많은 신도가 생겼다면 이는 네가 성공한 것이냐, 내가 성공한 것이냐?”
라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에만 집중하여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 소명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자칫 가리옷 유다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명과 사명을 구분해야 합니다.
소명은 생명을 요구하신다는 것이고 사명은 일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결혼할 때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의 능력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본인도 어떤 능력으로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이혼의 빌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소 아내와 호랑이 남편이 결혼하였습니다.
소 아내는 호랑이 남편에게 맛있는 샐러드를 대접했고
호랑이 남편은 맛있는 살코기만을 잡아 왔습니다.
결국, 둘은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일 시키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은 당신이 다 하십니다.
그것보다 우선 주님은 당신과 함께해줄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불러주실 때 저는 “제가 아이 낳아서 주님께 두 명 이상 봉헌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나는 너를 원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무언가 해 드리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를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신학교 들어와서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정말 감사해서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생명까지도 다 드리겠습니다.
당신께 무엇을 해 드리면 좋을까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다. 나에게 붙어 있어라!”
우리는 자꾸 나를 불러주신 분을 위해 무언가 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 자체가 그분께는 모욕이 됩니다.
나 없으면 무언가 부족한 분으로 내가 취급해드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내가 없어도 잘만 지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내 능력으로 무언가 해 드리는 일이 아닌 그저 당신 덕분에 행복해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주님께서 나를 써주셔서 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소명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그분 부르심의 응답입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분께 나 자신을 봉헌하여 붙어 있을 줄 아는 것이 소명에 응답한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렇게 소명을 기도로 응답하면 사명은 그때그때 내려주십니다.
저는 유튜브를 시작한 것을 매우 만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강의하는 것에 지쳐 있었고 또 저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서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때 주님은 코로나를 주셨고 코로나 동안 갑자기 시간이 생겨서 기도하던 중 주님께서 유튜브를 하라는
강한 느낌을 주셨습니다.
저는 처음에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았고 그들은 팀을 꾸려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저는 채널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여 찍고 편집하는 방법 등을 유튜브 보고 스스로 배워 부족하지만 조금씩 올렸습니다.
일 년 반이 지난 지금 많은 분이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공감해주십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도 어려워하던 것들을 평신도분들이 이해하고 삶을 그렇게 변화시키려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내 힘으로 무엇을 하는 것보다는 주님의 뜻에 맡겨 사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께 주의만 기울이고 있다면 사명은 주님께서 그때그때 알려주십니다. 내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명은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은 소명입니다.
소명이 있으면 사명은 필요할 때 저절로 주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삶의 목적이나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찾지 마십시오. 우선 내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먼저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이 아닌 당신을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으시고 당신이 내려가셔서 선교하십니다.
제자들을 뽑으시고 일을 시키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보다는 소명에 집중합시다.
주님은 나를 원하고 계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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