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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10-27 조회수 : 174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을 선택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복음 본문의 흐름으로 보면 좁은 문은 아주 분명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안식일을 설명하시며 ‘열여덟 해 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던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저는 열여덟이 세속-육신-마귀의 합쳐진 숫자라 해석했습니다.
세속-육신-마귀가 인간을 땅을 보는 짐승처럼 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말씀과 은총’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녀의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시고 안수로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다음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며 ‘겨자씨와 누룩’으로 표현하십니다.
겨자씨는 말씀과 같고 누룩은 은총과 같습니다.
누룩은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집니다.
세속-육신-마귀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은총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자라나면 새가 날아와 쉬게 할 휴식처를 제공합니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리와 은총은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을 죽이고 이웃을 위해 살게 만들어 짐승의 삶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 말씀에서 ‘좁은 문’은 ‘겨자씨와 누룩’ 때문에 당해야 하는 ‘십자가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룩으로 자기 자신이 죽는 것도 고통이요, 이웃을 위해 겨자나무가 자라나게 하는 것도 고통입니다. 
 
폴 브랜드는 선교사이고 의사입니다.
루이지애나주에서 의사로 일할 때 한 엄마가 딸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아이의 발엔 붕대가 감겨있었습니다.
폴은 아이가 아프지 않게 붕대를 하나하나 풀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남의 일인 양 진료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폴이 붕대를 다 풀었을 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발바닥에 종양이 생겨 발이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는 비닐 위에 빨간색으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낙서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가까이 와서 보니 아이는 자기 손가락의 피로 그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입을 보니 치아에도 피가 묻어있었습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손가락을 물어뜯은 것입니다.
아이의 한 손가락은 그렇게 이미 짧아져 있었습니다. 발에 난 상처는 못이 박힌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썩은 것입니다. 
 
남편은 이런 ‘괴물’을 어떻게 키우느냐며 집을 나갔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얼마 뒤 양발과 손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상처가 났는데 아프지 않으면 자신의 몸이 망가집니다. 성장할 수 없습니다.
나병균이 손과 발, 눈 등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나병균은 그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눈이 이물질이 들어가면 고통을 느껴 깜빡이거나 이물질을 빼내야 하는데 눈이 곪고 썩어들어가도 감각이 없으니 눈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기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발에 뼈가 드러나도 그 뼈로 걷고, 불에 데면서도 손으로 뜨거운 것을 짚습니다.
처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특권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고통이 없는 이 병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상에서 체험될 수 있는 가장 큰 지옥의 고통이 됩니다. 
 
폴 박사가 해외에서 나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심하게 지쳐있는 데다 몸에 열이 난 상태로 강연까지 소화해야 했습니다.
간신히 기차를 타고 강연장까지 가서 연설하고 집에 누웠을 때는 발에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늘로 발을 찔러보았더니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더 깊이 찔러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폴 박사는 절망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환자를 치료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감각이 있어야 치료해 줄 수 있고 눈이 보여야 하는데 나병에 걸렸다면 이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뿐입니다. 
 
다음날 다시 바늘로 찔렀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따끔했습니다.
몸이 안 좋은 상태로 기차를 타고 왔는데 한 다리가 눌려서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일시적으로 마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폴 박사는 고통이란 것이 그렇게 큰 은총인지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조: 『고통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와 필립 얀시, 두란노서원]
 
다미안 신부님도 나병 환자들만 모아놓은 섬에 들어가 그들이 하느님 자녀임을 알려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삶을 사는 그들은 신부님의 사랑을 그저 하나의 동정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도 나병이 걸리고 자신들을 형제라고 부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신부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정말 많은 나병 환자들이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만약 다미안 신부님이 본래 나병 환자였다면 그저 환자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감사하게도’ 나병에 걸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은총과 진리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만 보이게 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이웃을 위해 고통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데 왜 아파야 해요?”라고 묻는다면 사랑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 나를 봉헌하는 것도 고통이어야 하고 또 이웃에게 내 피를 흘려주는 것도 고통이어야 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누룩도 밀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할 수 없고 겨자씨도 나무로 자라지 못합니다.
 
따라서 고통의 신비를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사랑이 가능함을 믿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그 은총의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조금 더 받으려고 노력합시다.
딸아이가 나병에 걸린 것을 보고 도망치는 아버지처럼 되지 맙시다. 
 
좁은 문, 십자가의 길, 이는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 이웃을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좁은 문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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