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 버클리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1만 원을 나눠주고 익명의 낯선 이와 원하는 만큼 나눠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인심을 후하게 쓰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소득 최하위권에 있는 사람들은 수입의 3%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반면, 상위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1%만을 기부했습니다(물론 이 1%가 전체 기부금의 70%를 상회합니다).
부유하지 않은 사람이 실제로 더 베푸는 경향이 많다는 실험이었습니다. 이들이 비록 돈은 적지만 사랑을 많이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보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이유를 찾게 됩니다. 부자가 더 많은 액수를 나누기는 하지만 여유 있는 데서 조금 나누는 것으로, 진정한 사랑 실천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실천을 많이 해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왜 이렇게 판단력을 잃게 되었을까요? 사실 우리 삶의 방식을 잘 살펴보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좋은 일이라도 하기 싫은 일이 있고, 반대로 나쁜 일이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이럴 때면 묘한 핑계를 붙여서 꼭 내 마음대로 하고 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특히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이득이 더 많은 쪽을 선택하는 우리였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던 모습이지요.
최초의 사람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서는 하와 핑계를 댔었고, 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어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으로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표징을 볼 수 있고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뜻인 사랑을 철저하게 지키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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