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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2일_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10-22 조회수 : 1967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성령의 불을 붙이시기 위해 십자가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성령으로 죄가 씻겨지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그 ‘성령의 불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어야 타당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름이 서쪽에서 오면 비가 올 것을 알고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는 것을 압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로 번역되었지만, 직역하면 “이 시기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입니다.
곧 당신께서 성령을 주시는 이때를 왜 깨닫지 못하느냐는 뜻입니다. 
 
이 시기란 이제 우리를 고소한 자에게서 풀려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라고 하시는데,
합의한다기보다기보다는 수동태로 “풀리도록(to be released) 힘써라!”로 번역하는 게 옳습니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성령에 의해 풀려나는 것이지 내 힘으로 능동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인본주의적 생각이 그리스도 피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죄는 내 노력이 아니라 용서로 풀리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새총으로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를 죽였습니다.
장작 사이에 몰래 감추어놓았지만, 이것을 여동생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여동생은 오빠를 부려먹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설거지나 심부름을 “오리를 기억해?”라고 하며 할머니에게는 “오빠가 다 하겠대요!”라고 말합니다.
며칠 동안 동생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너무 힘들어 할머니에게 다 고백합니다. 할머니는 말합니다. 
 
“나도 다 알고 있었단다. 단지 네가 동생에게 어디까지 끌려다니나 보고 있었던 거다.”
내 죄책감은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대상에게서 용서를 받아야 사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알려주는 시스템이 ‘양심’입니다.
이 양심은 하느님이 넣어주셨고 그래서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심판관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우리 모든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탄이 됩니다. 양심은 나를 고소하는 알람과 같은 기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나를 고소하기 위해 끌고 가는 사람이 바로 ‘양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재판관’에게 넘겨지는데 여기에서 재판관은 ‘자기 자신’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스스로 죄인으로 심판하여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러면 ‘옥리’에게 넘겨지는데 옥리는 마귀이고 ‘사탄’입니다.
죄책감은 나를 사탄의 손아귀에 쥐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성령의 불이 우리를 양심의 고발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엔 죄와 지옥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이 뻔한데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양심이 없다거나 스스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클랜’(2015)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를 믿다가 은퇴한 한 아버지 푸치오가
부자들을 납치해 일말의 양심도 없이 돈을 뜯어냈던 사건을 담았습니다.
아들 알렉스는 친구를 납치하는데, 아버지를 위해 작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받고는 아버지가 친구를 죽인 것을 알자 그 일에서 손을 떼려 합니다.
알렉스는 아버지를 떠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다 경찰에 걸리고 맙니다. 
 
알렉스와 아버지는 종신형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가정을 위해 했다고 줄기차게 자기합리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합리화를 하지 못한 알렉스는 어떻게 했을까요? 법정으로 가다가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시도를 했지만 죽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법학 학위를 받아 2008년 출소하여 변호사 일을 합니다.
소시오패스가 변호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려 해도 주위의 영향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저런 가정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살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도 원죄의 영향으로 죄에 물들지 않을 수 없는 환경입니다.
알렉스가 자살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가족을 위한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양심의 가책을 자기 힘으로 무마하려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양심이 없다면 자살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기합리화하면 됩니다.
물론 자기합리화가 지나치면 결국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가 됩니다. 
 
양심의 문제를 내버려 두면 끊임없는 자기합리화로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되거나 자기합리화를 멈추면
그 죄책감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은 사이코패스가 되었고 유다는 자살했습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굴레에서 인간은 점점 더 사탄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물론 자살한다고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쨌건 예수님의 제자들은 용서를 청하고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통해서만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변하지 않는 굴레를 이해하고 빨리 성령을 받고 탈출하라는 말씀입니다. 
 
양심은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알람이기에 모두에게 똑같이 작용하고 장착해주신 하느님만 다시 바로잡아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 방법은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가죽옷이 성령의 불입니다.
그런데 가죽옷을 입으면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죄만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인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음을 믿고 그리스도로 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주는 사랑을 받으면 부모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두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닌 이상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자아와 사탄에게 넘겨져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처럼 하나의 법칙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리스도로 사느냐, 인간으로 사느냐는 그리스도로 사느냐 사탄이 되어가느냐와 같은 말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고발자인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느냐, 아니면 계속 끌려가 지옥으로 들어가느냐, 두 선택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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