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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1일_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10-21 조회수 : 1437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를 일러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하시며,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라고도 하십니다.
당신의 세례를 통해서 세상에 불이 질러진다는 뜻입니다. 
‘불’은 ‘빛’이 되기도 하고 ‘나를 태우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을 받으신 분답게 당신이 짓눌러져야 함을 예상하십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의 세례로 불이 붙어진 이들은 이전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족과도 세상과도 분리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중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단편영화로 제작한 것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습니다.
‘44번 버스’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중국의 어느 시골길에서 한 청년이 2시간 가까이 기다려 44번 버스를 탑니다.
버스 운전자는 예쁜 여자입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가던 버스는 몸이 아파 보이는 두 사람을 발견합니다.
착한 운전자는 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버스에 태웁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변합니다.
강도였던 것입니다.
칼로 위협하며 버스에 탄 사람들에게 금품을 갈취합니다.
버스 안에 남자들도 많이 타고 있었지만 다치기 싫어서 모두 고분고분 가진 것을 다 내어줍니다. 
 
그들은 할 일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립니다.
내리다가 운전자의 얼굴을 보고는 운전자를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성폭행하려는 것입니다.
버스에 탄 남자들은 그런 상황에서 힘을 합치면 강도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말리고 어머니가 말려서 누구도 운전자를 도와주지 못합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탔던 그 청년만이 밖으로 뛰어나가 싸웁니다.
그러다 칼을 다리에 찔립니다. 
 
여자 운전자는 심한 폭행을 당하고 다시 버스에 탑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승객들을 노려봅니다.
이때 절뚝거리며 청년도 버스에 다시 타려 합니다. 그러나 운전자는 그 청년의 가방을 밖으로 던져주고는
문을 닫고 출발합니다.
청년은 어리둥절합니다.
도와주려 피까지 흘린 자신만 태우지 않고 떠나버리더니! 나중에서야 청년은 알게 됩니다.
그 운전자는 길을 가다 높은 다리에서 버스를 추락시켰습니다.
자신과 함께 버스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사망하였습니다. 
 
세례 때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은 ‘은총과 진리’입니다. 진리는 마치 빛과 같아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은총은 그렇게 행동하도록 힘을 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불’이라고 언급하신 것이 바로 ‘진리’이고, 짓눌리게 만드는 ‘압력’이 바로 은총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어 은총을 받았기에 생전 모르는 형제까지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여자 운전자는 세례를 거부했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 중 유일하게 그녀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청년밖에 없었습니다.
청년은 생판 모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그렇게 하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운전자는 그 부담스러움 때문에 그를 태우지 않습니다.
세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를 위해 은총과 진리를 쏟아내신 분이십니다.
만약 그분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분이 하신 일을 보고 또 그분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그분처럼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을 거부한다는 말은 그분처럼 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버스 운전자처럼 됩니다. 
 
버스 운전자는 그 부담스러운 남성을 받아들여 자신도 똑같이 아무 잘못도 없이 피를 흘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버스에 탄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바로 피 흘림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청년을 받아들였다면 마치 깨가 열과 압력으로 기름이 짜이듯 자신도 버스에 탄 승객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린 그 사람까지 함께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내 안에 태우는 것이 세례입니다.
피 흘리시는 그리스도를 태웠다는 증거는 나도 누군가를 피 흘리게 한 사람이기에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는 세례를 받고도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이는 실제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빛과 열로 우리를 당신처럼 살도록 강요하십니다.
그 첫 열매가 ‘용서’인 것입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체험한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브라디는 수녀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수녀님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브라디의 빛이 되고 압력이 됩니다.
수녀님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은총과 빛을 받아들였고 자신도 그렇게 불과 압력으로 기름이 짜이듯 죽었습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세례를 부르고 용서는 용서를 부릅니다. 
이 시작이 세례가 되는 것이고 세례를 받았더라도
누군가 용서가 안 된다면 나는 예수님을 내 버스 밖에 내려놓은 것이 됩니다.
그렇게 불타고 있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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