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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10-13 조회수 : 1478

십일조보다 사랑실천인가, 십일조 통해서 사랑실천인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특별히 그들은 십일조는 잘 지키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실천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이웃사랑입니다.
하느님께 자비를 받았으니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의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십일조는 내면서 사랑실천은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십일조’는 바리사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나는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라는 명목으로 지키는 대표적인 조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일조를 지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더 중요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십일조를 통해서 사랑실천을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나라 말의 번역은 약간 십일조와 사랑실천이 별개인 것처럼 해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십일조와 사랑실천을 별개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지 않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서로 죄짓게 만들고 서로를 심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사랑하지 않고 자기가 주체가 되어 사랑하면 그 사랑은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바치는 것은 십일조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봉헌다는 뜻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하느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행위를 저버리면 이웃사랑도 당연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해석은 “너희들이 꼭 지키는 십일조보다는 사랑실천을 해야 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의 십일조가 사랑실천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느냐?”라고 하시는 뜻이 됩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일까요? 당연합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형제끼리는 잘 지내게 될까요?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형제끼리 잘 지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이 부모가 하느님이 된다면 그것은 감사의 십일조가 될 것입니다. 
 
유튜브에는 부모를 피해 집을 나와 혼자 평생을 산속이나 다리 밑에서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34년째 길 위에서 사는 남자의 사연’이 있습니다.
한 번 가졌던 부모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면서 혼자 집을 나간 장남.
그러나 하는 일마다 잘 안 되어 34년 동안 형제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다리 밑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많이 잘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부모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면 형제에 대한 애정과 책임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용돈을 모아서 부모 생신 때 선물을 해 드립니다.
그렇게 되는 가족이라면 형제들 간의 우애도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인공 기훈은 착하지만, 돈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누구도 이 게임에 강제로 참여하라는 강요를 받지 않습니다.
모두가 큰 빚을 지고 있기에 여섯 개의 게임을 잘 통과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배신하고 죽이고 죽습니다.
이는 돈을 위해 달려가는 우리의 삶이 마치 오징어 게임 안에 있는 것과 같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착한 사람 기훈은 정말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는 누구도 짝이 되려 하지 않는 1번 할아버지 일남과 짝을 맺습니다. 
그런 짝과 게임을 하면 질 게 뻔합니다.
그러나 게임은 둘이 구슬 따먹기를 해서 다 잃는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게임의 달인이기 때문에 이정재의 구슬을 거의 다 땁니다. 
 
할아버지는 말기 암 환자로 몇 달밖에 살 수 없습니다.
이정재는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것으로 단정하고 할아버지를 속입니다.
홀이라고 했는데 짝이라고 했다고 하고 짝이라고 했는데 홀이라고 바꿉니다.
그렇게 죄책감이 들기는 하지만 일남 할아버지를 속여서 구슬을 다시 빼앗습니다.
이때의 짧은 대화가 뇌리에 남습니다.
일남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구슬이 다 없어졌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구슬이 하나 남아있었습니다. 
 
“구슬이 하나 더 있었네?”
“우리 다 걸고 한 판 할까?”
“그 구슬 하나랑 이걸 다 걸라고요?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기훈은 화를 버럭 내며 소리칩니다.
이때 일남이 차분하게 말합니다. 
“내 구슬 가져간 건 말이 되고?”
일남은 치매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저 자기를 선택해 준 기훈에게 베풀고 싶었을 뿐입니다.
일남은 남은 구슬을 기훈에게 넘겨주며 말합니다. 
“그동안 고마웠네. 괜찮을 거야.” 
 
그리고 일남은 죽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임을 만든 건 일남이기 때문입니다.
일남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재밌게 게임을 하다가 죽고 싶은 마음에 이 게임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게임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단 한 사람이 일남입니다.
언제든 누군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착하게만 보였던 기훈이 아니라 일남만이 이 안에서 사랑할 준비가 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다면 아무리 혼자 힘으로 이 세상에서 이웃을 사랑하려 해도 안 된다는 것이
이 시리즈물이 주는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이 게임에 들어온 모든 사람은 거의 모두가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빚쟁이들이었습니다.
빚을 지게 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기훈이 막일이라도 했다면 수백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을까요? 그는 일하는 대신 경마 도박을 했습니다.
빚이 없다면 돈에 대한 욕심도 없게 되고 그러면 오징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세상을 벗어난 사람만 게임을 즐기며 사는 것처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시기도 한 하느님을 먼저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믿음을 유지하게 하시기 위해 선악과를 준비해 두셨고 구약에서는 그것이 계속 같은 의미로
십일조 계명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내는 것은 일남 할아버지처럼 세상을 즐기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데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십일조는 하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목적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오징어 게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의 의미를 바로잡아 주려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도구로 십일조가 사용될 때야만 하느님 사랑을 통해 이웃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오징어 게임은 놀이입니다.
이 놀이에서 유일하게 동심을 유지하며 즐긴 단 한 사람은 일남 할아버지 하나였습니다.
재산도 많고 어차피 죽을 것이라서 잃을 게 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도 이처럼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일조는 안 내도 되고 사랑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뜻이 아니라 십일조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이 더 강할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을 아버지로 믿을 수 있어야 일남 할아버지처럼 이 세상을 즐기면서도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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