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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1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10-12 조회수 : 1620

지나친 의전이나 형식주의는 내적 탐욕과 사악의 열매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형식주의’를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바리사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사람이 형식주의자가 되는 이유는 속이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숨기기 위해 그 반작용으로 겉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을 지나치게 깨끗하게 하고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 안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형식에 신경 쓸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저의 동기 신부 하나가 보좌 신부 때 랍스터를 처음으로 단 한 번 먹어보고는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동기 신부가 부자 동네 본당에서 제2 보좌를 할 때였습니다.
그 신부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본당 청년들이 신부님께 음식 대접을 해 드리겠다고 청했습니다.
그 신부는 학생들이 돈이 어디 있느냐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선배 신부인 제1 보좌 신부님을 통해 청년들에게 잘 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제1 보좌 신부님은 신부님이 청년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해하라고 청년들을 설득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은 워낙 고급스러워서 너희들 돈 많이 들걸? 그 신부님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아니면 안 가.”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청년들은 돈을 모아 호텔 레스토랑에 랍스터를 예약해 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축일 날 그 신부님은 청년들을 따라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주눅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개씩 놓여있는 스푼과 나이프, 포크 등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고, 또 랍스터가 나왔는데 함께 나오는 서로 길이가 다른 가위와 뱀 혀처럼 생긴 꼬챙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청년들을 보며 따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또 신부님이 먼저 드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청년들이 포도주를 시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어떤 포도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촌스러웠던 그 신부님은 “어? 그냥 다 좋아!”라고 말을 흘렸고 청년들은 자신들이 고른 포도주를 시켰습니다.
웨이터는 포도주를 따고 신부님에게 “테이스팅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어…. 그냥 주세요. 좋은 포도주 같은데….”라고 하였고 청년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긴장 속에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라면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아닌데 그런 척하려니까 정말 힘들더라.
그냥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맞습니다. 본질보다는 형식에 주위를 더 기울이며 살면 인생을 즐기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포도주 전문가가 말했습니다. 
“포도주는 마시고 취하면 그만입니다.”
아마 음식 전문가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먹어서 맛있으면 좋은 음식입니다.”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은 것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면 잘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이 가미되면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청년들이 고급 레스토랑에 가기를 싫어하는 사제를 억지로라도 그런 곳으로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만약 사랑했다면 형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형식을 차리며 먹는 랍스터보다 집에서 혼자 끓여 먹는 라면이 더 맛있습니다.
형식에 얽매이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자유롭게 해 주는 게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그런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 줍니다. 
 
저도 유학을 10년 가까이 다녀왔기 때문에 물론 어느 정도는 레스토랑 식사법에 대해 압니다.
그러나 약간 어려워하는 신자들과 그런 곳에 가면 스테이크를 자르지도 않고 그냥 포크로 찍어서 한 입 베어 뭅니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형식을 중요시 하는 곳에 가면 숨이 막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교회 내에도 이런 형식주의가 얼마나 만연한지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신부님, 주교님, 추기경님, 교황님이라
부르기보다는 Reverendo(존경할만한 분: 사제), Eccellenza(탁월하신 분: 주교), Eminenza(위대하신 분: 추기경), Santita(거룩하신 분: 교황)등의 칭호를 붙입니다.
예수님이 들으시면 웃으실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은 하느님도 어쩌면 부담스러워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들이 이런 용어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과 형식은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야 할까요? 그냥 본질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본질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형식만 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나뭇잎과 열매의 관계와 같습니다.
나무는 분명 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언제나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가 가져가야 할 에너지까지 잎을 키우는 데 쓰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게 됩니다.
그러면 못 쓰는 나무가 됩니다.
에너지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열매를 최대한 많이 맺게 하려면 잎은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게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 오셨을 때 의전 차량을 가장 작은 것으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심 끝에 소울로 의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교황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기분 나쁠 수도 있습니다. 돈 자랑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커지기 위해 형식은 작아져야 함을 압니다.
형식이 지나치면 모두가 사랑의 에너지를 빼앗는 것입니다. 
 
나무는 열매와 잎의 균형을 맞출 줄 압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균형을 맞추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탐욕과 사악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무 형식에 치우치고 있다면 그만큼 사랑에 쏟을 에너지가 줄어들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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