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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0-09 조회수 : 1100

‘양심’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나는 창조자가 아니라 관리자라는 고백 
 
당시 예수님께서 인기가 대단하셨나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아마 ‘나도 저런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행복론을 바로잡아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계명’입니다. 
왜 어떤 것을 가지는 것보다 계명을 지키는 게 더 행복할까요?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귀한 것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관리자에게 맡길 때 꼭 주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설계도와 운영 안내서’입니다. 그리고 운영자를 못 믿어서인지 그 매뉴얼 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관리자를 괴롭히는 시스템을 넣어놓는데 이것이 ‘안전 시스템’입니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는 이유는 항상 관리자가 창조자보다 그것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관리자가 창조자의 안내서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알람을 울려서 관리자가 창조자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제가 처음 영성관에 왔을 때 자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새벽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신속히 대피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엄청난 사이렌 굉음과 함께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듯 뛰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화재가 발생한 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영성관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무조건 ‘119’에 신고했습니다.
그분들은 정말 불이 난 것이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 저는 사이렌이 울리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밖에 서서 소방차를 기다렸습니다. 
 
새벽에 출동했던 소방대원들은 화가 잔뜩 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화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끔가다 소방 시스템이 오작동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울리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영성관 구석구석을 살피며 아무 이상이 없으면 일단 알람을 해제하고 잠을 잡니다. 
그러면 다음 날 소방점검 회사에서 와서 더 확인하고 시스템을 원래대로 해 놓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것 같습니다. 
 
알람 시스템은 정말 귀찮습니다.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민감해서 훈련을 시키듯 울려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알람 시스템은 그만큼 이 건물을 운용하는 사람이 긴장해서 매뉴얼 대로 건물을 사용해야 건물이 안전할 수 있게 해 주는 꼭 필요한 장치입니다.
 
매뉴얼은 그 건물을 만든 이가 처음부터 만들어 놓은 설계도와 운영세칙입니다.
관리자는 안전 시스템의 알람이 울릴 때마다 매뉴얼을 공부하고 창조자의 본래 의도대로 그것을 관리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알람 시스템이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요즘은 자동차에 아기가 혼자 남겨지지 않도록 자동차에 아기가 있다면 경고음이 울리는 시스템이 장착되어 나오는 차가 많다고 합니다. 
아기들이 부모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가 자기 생명을 책임져 줄 창조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스마트폰이 인간에게서 멀어져 원숭이 손에 들어가면 그것의 생명은 끝난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도 인간을 만드시고 그것을 운영할 인간에게 당신의 창조 의도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알람이 울리게 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을 ‘양심’이라 합니다. 양심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질 때 울려주어 우리가 하느님 뜻에서 멀어졌음을 경고합니다.
이 느낌을 ‘불안’이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참 행복은 무언가를 소유하여 단순한 걱정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 말씀이라는 매뉴얼을 따르는 것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거짓말 탐지기’와 같은 것도 사용하면서 양심의 존재는 무시합니다.
양심은 그저 진화론적으로 생겨난 무엇이거나 교육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맡아 운영하는 운영자일 뿐입니다. 
내가 만들지 않아서 나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안전 시스템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나 자신을 운행하면 망가지는 게 순서입니다.
소방 시스템을 무시한 건물 관리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나는지 우리는 어렵지 않고 보아오고 있습니다. 
 
1986년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원전 사고가 있었습니다.
원전 담당자는 피를 토하며 쓰러질 때까지 원전이 폭발한 것이 아니라 냉각기가 폭발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자신만큼 발전소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뒤늦게 이 모든 사태에 직면한 정부 또한 이 심각성을 인지 못 하고 일단 감추려는 데 전념했습니다.
체르노빌을 봉쇄하고 사람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전화선도 끊었습니다.
그리고 사태를 악화시킬 일만 했습니다. 
결국, 피신하지 못한 모든 사람이 방사능에 노출되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은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낙진을 맞으며 즐거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2~3일 후 바람을 타고 날아간 방사성 물질들이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까지 감지되었고 미국 인공위성이 이것을 찍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시간을 그들은 알람 시스템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창조자처럼 완전히 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사고는 터빈의 관성력으로만 얼마만큼의 발전이 가능한지에 관한 실험을 하기 위해 안전 시스템을 해제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습니다.
양심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신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알람 시스템을 끄고 실험을 하다 사고가 발생했고 그는 자신이 그런 실수를 했을 것으로 인정하지 않아 자신은 물론이요 수많은 사람이 죽게 했습니다.
정부 또한 매뉴얼대로 하지 않고 이 일을 은폐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의 피해를 늘렸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것들에는 안전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음을 믿지 않으면 우리 개인들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자신도 그렇게 가정도 그렇게 나라도 그렇게 세상도 그렇습니다.
내가 만들지 않았으면 창조자의 매뉴얼대로 운영해야 한다는 겸손을 되찾아야 합니다.
 
주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을 하며 양심의 알람이 울리는데도 ‘그럴 리가 없다.’라며 그 불안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거나 그 불안을 잊으려고 더 큰 죄에 물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멸망시킵니다. 
세상도 그렇게 멸망의 길로 갑니다. 
 
우리가 겸손을 회복했다는 증거는 바로 ‘양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 양심이 알람을 울리지 않도록
운영세칙인 하느님의 말씀을 순간마다 찾는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존재와 가장 가까운 말은 ‘뜻’입니다.
엄마 품에서 자기 뜻대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드님을 가져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시기에
행복하신 것입니다. 
 
내 안에 양심이 있다면 분명 누군가가 나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양심은 매뉴얼대로 작동하고 양심과 매뉴얼이 있다면 나를 만드신 분이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뜻대로 삶으로써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끼며 주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위해 무언가를 소유해서가 아니라 주님 뜻에서 멀어질 때 느끼는 불안을 먼저 해소하려고 합시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창조된 자로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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