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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0-04 조회수 : 1200

고통은 왜 신비인가?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율법의 핵심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깨달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깨달았지만, 아직 실천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은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면 모두가 다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분별하는 이유는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사람을 분별하여 나에게 이익이 될 사람에게만 잘해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버려야 분별심이 사라지고 모두에게 자신에게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버리는 방식은 타인은 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타인이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를 위해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자아를 위하는 삶에서 벗어납니다.
생판 모르는 채로 태어나 만난 형제이지만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분별이 사라지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 인류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모든 생명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생명이 다 그분에게서 와서 그분과 별개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모든 존재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살 때 필연적으로 내가 죽습니다.
이것을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자아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어서 사랑하려면 필연적으로 넘어야 하는 산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하느님께 예배는 드리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을 믿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길에 쓰러져있던 강도 만난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친형제였다면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분별력이 생겨서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을 예배하러 성전에 가지는 않지만,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아픔을 남의 아픔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아를 죽이는 아픔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아픔 안에 세상의 아픔이 포함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이기에 타인의 고통을 통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아픈 것처럼 상대를 바라보니 아픈 사람을 그냥 놓고 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해야 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할 수밖에 없어서 하게 됩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높은 탑에 갇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탑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도움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소리를 크게 질렀지만, 탑 아래의 분주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순금 동전을 떨어뜨렸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금 동전을 줍기 위해서 몰려들었지만, 금 동전에 온 정신이 팔려서 아무도 탑에 갇힌 사람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너진 벽으로부터 굳은 회반죽 한 덩어리를 떼어 내어서 구멍 밖으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가던 어떤 사람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게 하였습니다.
그때, 머리를 다친 사람은 고개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았고, 탑 안에 갇힌 사람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은 고통받는 사람뿐이란 뜻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길을 잃고 부모 없이 남의 집에서 자라서 버려지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 잘 아십니다.
그래서 집의 물건들을 잘 버리지 못하십니다. 
물건들에 당신의 아픔이 투영되는 것입니다.
혹은 가출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씻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신 적도 있습니다.
당신과 같은 처지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이런 사람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고통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고통이 타인도 살리고 나도 살리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고통과 멸시를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고통을 물론 나를 상처입힙니다. 
그러나 상처받아 봐야 내 몸처럼 치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일부러라도 단식도 해보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도 당해보는 등의 고통을 친구처럼 여기고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사랑하게 만드는 또 다른 원리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주님께 항상 고통과 멸시만을 청했습니다.
능동적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받고 싶을 정도로 고통의 가치를 아는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기도할 때, 위로와 고통에서의 해방만을 청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묵주기도에서 ‘고통의 신비’를 바치며 실제로는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신비는 곧 은총입니다. 고통이 은총이란 뜻입니다. 은총이라면 오히려 달라고 청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요?
그것을 자꾸 피하려고만 한다면 나에게 이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면 더 약해지고 생명도 잃습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말이 있습니다.
미 해군 장교였던 제임스 스톡데일은 베트남전 당시 포로로 잡혀 기약 없는 잦은 고문을 당하며 8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삼성장군이 되어 대통령 후보로도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는 왜 어떤 이들은 포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석방되리라 믿었던 이들은 크리스마스를 지나게 되면 그래도 부활절이 되기 전까지는 석방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시 크리스마스를 맡게 되며 상실감이 반복되자
결국 버티어내지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낙관주의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혹한 현실을 직시하되, 마침내 이기겠다는 믿음 또한 유지해야 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물론 고통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이 신비롭다고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보다는 지금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드는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을 빨리 떨쳐버려야 할 원수처럼 여기기보다 나를 동반 성장시키는 친구처럼 여겨야 합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때는 매우 추운 겨울이었고 눈보라가 치고 있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은 죽지는 않았으나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길을 가던 두 사람도 탈진 상태였습니다. 
 
한 사람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가자고 했고 다른 사람은 그러면 우리가 모두 죽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한 친구는 먼저 떠났고 다른 한 친구는 그 사람을 둘러업고 걸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이르러 먼저 갔던 친구가 얼어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쓰러진 사람을 들쳐 입은 사람은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 덕분에 살게 된 것입니다. 
 
칼 융은 “모든 신경증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했고,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날 더 강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고통이 쓸수록 열매가 달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만 말고 친구로 대해봅시다.
내가 참아내는 고통이 이웃을 더 공감하고 사랑하게 만들어서 결국엔 그것이 나를 살리게 할 것입니다.
내가 이기지 못할 고통은 주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이겨낼 때 사랑할 수 있게 되어 그것이 나의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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