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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3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0-03 조회수 : 732

어렸을 때 어른들은 제게 이런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너 사실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실제로 동네에 개천이 있었고, 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이 다리를 지날 때마다 다리 밑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워왔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믿게 된 것은 제 위의 형·누나와 다른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형, 누나들은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잘하는 것이 많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리 밑에서 정말로 주워 왔나 봐’라는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행려자가 놀고 있는 저를 빤히 보더니, “너 나랑 같이 살래?”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저 역시 이분을 유심히 바라봤습니다. 혹시 저를 다리 밑에 버린 진짜 아버지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진짜로 쫓아갈 생각도 했었습니다. 

다른 점만을 생각하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제 고향이 다리 밑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제 형제들 얼굴이 다 똑같습니다. 눈꼬리가 처진 것, 주름 많은 것 등등 같은 점이 너무 많습니다. 같은 점을 보지 못하면 함께 할 수 없지만, 같은 점을 생각하면 함께 할 이유가 너무 많아집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에 대해 다시 물으시고, 바리사이들은 이혼을 허락하는 성경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즉,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의 말은 바리사이들이 신명 24,1.3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혼인을 제정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혼을 허락하는 성경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이혼의 허락은 상대의 ‘추한 것’이 드러날 때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추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며,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을 ‘추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를 이루는 같은 점을 먼저 생각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어린이를 축복해달라는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언짢게 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내를 버리는 모습이나, 어린이를 쫓는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차이점을 찾으며 갈라내는 모습은 ‘하나’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십니다. 그만큼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를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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