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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10-01 조회수 : 954

지옥에 가는 이유: ‘행복’을 원하지 않아서
 
오늘 복음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 고을은 한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실 때,
‘하늘’과 상반되는 ‘저승’은 곧 지옥을 나타냅니다. 
이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들의 운명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기쁩니까?
이 소식은 나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의로우신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내가 죽고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면 기쁩니까? 오늘 저주받은 고을들도 그렇게 주저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 행복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누구나 다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것이 더 많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미 무엇이 행복인지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복음이 맛이 없는 것입니다.
술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술을 끊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서전에서 평생 122명의 여인과 잠자리를 하였다고 써서 전 세계에 유명하게 회자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카사노바’입니다. 
그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혹은
“나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
“나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남자다.”라는 등의 말을 남겼습니다. 
 
카사노바는 배우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그는 성직자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키도 크고 외모도 출중했지만 동시에 천재였습니다.
그래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 영어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대학교 때 학습 능력이 대단하여 고전 문학을 줄줄이 꿰었음은 물론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훗날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특히 춤, 펜싱, 승마 등 몸으로 하는 모든 궁중 예술과 카드놀이에서 여느 귀족 가문의 기사보다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환상적인 기억력입니다. 카사노바는 70년 평생 자기가 본 얼굴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고, 자신이 듣고 읽고 말하고 본 것을 모두 다 기억했다고 합니다.
 
서품 준비에 한창이던 때 일흔 살인 사제 말리피에로가 어린 가수 테레즈를 농락하는 것을 봅니다.
혼란스러운 그는 백작의 딸인 루시아라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욕정을 절제한 채 그녀를 떠납니다. 
하지만 훗날 그녀가 어느 호색한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도 여러 여자와 특별히 높은 신분의 여자들과의 관계로 그는 성직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여기저기를 평생 도망 다니며 많은 여자를 꾀고 돈을 위해 사기를 치고 다녔지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한 공작부인의 돈을 빼앗기 위해 임신한 여인을 데려와 방금 죽은 아내의 영혼에 그녀가 죽으면 영혼을 환생시켜주겠다고 말하고는 만약 유산을 이 배 속의 아이에게 상속하면 죽은 아내는 다시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 것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워낙 말을 잘했나 봅니다. 
 
평생 도망치며 감옥을 들락거리고 세상을 떠돌다 다시 베네치아로 와서 한 여자에게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73세의 나이로 외롭게 세상을 떠납니다. 
가장 오래 사귄 사람이 3개월입니다.
사실 그는 문란한 생활 때문에 성병에 자주 걸려 40대 중반부터는 성기능 장애가 오기도 했습니다.
천재로 태어나 성직자의 길을 택하여 위대한 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그는 결국 자신이 믿는 행복을 찾아 떠났고, 그렇게 자신이 원한 자유로운 떠돌이 생활만 하다 외롭게 죽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천재였지만 실제로 이룩한 업적은 하나도 없고, 돈으로 여자의 성을 착취한 호색한이며, 그 돈을 벌기 위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기를 치던 정말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는 평가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그리스도인으로 죽는다.”
 
카사노바는 분명 그리스도를 택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정도는 그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여자의 성을 착취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이라고 믿는 철학을 추구한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살면서 결국 돈도, 명예도, 성도 나를 온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행복은 돈이다.”, 혹은 “행복은 명예다.”라는 식으로 결정해 버리면 참 행복이 왔을 때는
그것을 밀쳐내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간신히 나뭇가지 하나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하던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그래, 그럼 그 손을 놓아라.” 
“당신 말고 다른 분은 안 계시는가요?”
 
위 사람은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행복을 원하는지, 행복에 대한 내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으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하느님만 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버리고 당신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행복을 찾지 않고 이미 그 행복을 인간의 수준으로 규정하여 복음을 밀쳐내면 오늘 저주받은 마을들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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