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당하면 더 좋은 이유: 평화가 되돌아오기에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여러 가지로 당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은 특별히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을 묵상해보겠습니다.
평화를 전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과 평화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기쁜 소식이 그것을 전한 사람에게 되돌아옵니다.
이 말은 기쁨과 평화가 곧 행복인데 기쁨과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전하는 사람은 더 평화롭고 기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많은 사람이 받아들여 회개할 때 더 기쁘지 않을까요?
어떻게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더 평화롭고 기쁠까요?
전에 들었던 것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 프란치스코가 행복에 대해 한 제자에게 이런 식으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형제여,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가? 잘 먹고 마시는 것? 혹은 감명 깊은 설교로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 그런 것이 아니라네.
내가 어느 집 문을 두드려 그 집 주인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좀 주시오.’라고 할 때
그 사람이 나를 문전박대하면 그것이 행복이라네. 그러면 나는 문을 다시 두드려 똑같이 청한다네.
그러면 그 사람은 나에게 구정물을 퍼부을 것이라네.
이것이 행복이라네.
그러면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청한다네.
그러면 그 사람이 몽둥이로 나를 때리겠지.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네.”
그때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내가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면 그것이 기쁨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은 오히려 복음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 멸시와 모욕, 고통을 당할 때가 더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아, 그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해서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무턱대고 돈을 벌어보겠다고 용역회사에 연락하였습니다.
용역회사에서는 조금 편한 곳으로 경험이 없는 저를 배정해 주었습니다.
오전엔 비계라고 불리는 공사장 쇠파이프를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긴장되고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쇠파이프를 들면서 제 얼굴이 세워져 있는 비계에 상처가 난 것입니다.
눈 아래에서 턱까지 길게 상처가 났습니다.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어차피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이라 목장갑이 시뻘게질 때까지 피를 닦아가며 일을 하였습니다.
점심때 나의 모습을 본 감독은 “아이, 경험자 좀 보내라니까 맨날 이런 초보를 보낸다니까?”라며 용역회사에 투덜댔습니다.
얼굴이 찢겨 피가 나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후에는 지하실로 내려가 물을 퍼내는 일을 혼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벌어본 돈이 5만 원이었습니다.
용역회사에 갔더니 거기에서 만 원을 뺐습니다. 그리고는 후시딘 사서 바르라고 2천 원을 다시 주었습니다.
그 상처는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3년은 갔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번 막일을 했습니다.
그러며 평생을 노동 현장에서 돈을 벌어 우리를 가르치셨던 아버지의 노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만약 너무 쉽게 공사장에서 돈을 벌고, 그래서 아버지가 우리를 키우기 위해 받은 고통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그만큼 감사하고 평화롭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 잘 표현된 예수님 수난의 영화를 볼 때는 그 느낌이 더 깊이 다가옵니다.
그때 느끼는 것이 무엇일까요? ‘평화’입니다.
아이의 행복은 부모에게 사랑받는 것에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 좋은 업적을 이뤄냈을 때보다는 그런 업적을 이뤄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확신을 가질 만큼 사랑을 믿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하는 아이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업적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복은 내가 이뤄내는 성취에 있지 않고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증가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받지 않은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도 복음을 전하며 박해받고 멸시받고 천대받고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니 마음의 평화가 배가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인들은 주님께 ‘고통과 멸시’를 청했던 것입니다.
행복의 크기는 곧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크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들의 영광이 아닌 고통에 동참해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다 멸시와 고통을 당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나를 향해 가졌던 마음을 알게 되고 그러면 그만큼 평화와 행복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평안에 머무는 길은 기분의 십자가의 고통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알바니아 예수회 사제인 ‘안톤 룰릭’ 신부님은 서품을 받자마자 공산정권에 의해 평생 감옥에서 모진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해 성탄절 밤에 그분은 당신의 고통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추운 겨울 맨몸으로 매달려 구타를 당하여 울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 오셨음을 깨닫고 큰 위로와 평화, 기쁨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첫해 성탄절의 체험이 40년이 넘는 동안 감옥살이를 기쁘게 견뎌낼 힘을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다니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조금이라도 체험해 본 것이 참 행복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이해하는 마중물이 될 때만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고통의 깊이는 그것이 만약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면 행복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행복을 전합시다.
그리고 거부당하고 멸시당하고 무시당할 때 기뻐합시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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