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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9-26 조회수 : 1216
9월26일 [연중 제26주일] 
 
마르코 9,38-43.45.47-48
 
친절해야 하는데, 뱀에게까지 친절해야 하는가?
 
오늘 복음은 이렇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어떤 사람을 고발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가 아니었는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에 제자들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제자들의 기대와 같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 이는 오히려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며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약간 뜬금없어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그 흐름을 보면 친절엔 보상이 반드시 따른다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굴지 말고 친절하면 그 보상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지만 하나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비바람이 치던 날 밤, 필라델피아에 온 한 노부부가 하룻밤을 머물고자 허름한 호텔을 찾아들었습니다.
도시의 축제 때문에 그 호텔에도 빈방이 없었습니다. 이때 종업원이 노부부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객실을 모두 다 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늦은 시간에 다른 숙소를 찾기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밤 한 시에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거리로 선생님 부부를 내보낼 수는 없군요.
그러니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라도 쉬었다 가시면 어떨까요?”
 
노부부는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며 그 종업원의 방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방값을 내면서 노부부의 남편이 종업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호텔주인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그런 호텔 하나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종업원은 농담으로 여기고 빙긋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인 1876년, 그 종업원은 비바람 치던 날 밤에 만났던 노부부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초청장과 함께 뉴욕 왕복 기차표가 동봉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뉴욕을 찾아갔고, 그를 초청한 노신사는
뉴욕 5번가 34거리로 가서 하늘 높이 솟아있는 새 빌딩 하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건물은 무려 1,900개의 객실을 갖춘 거대한 호텔이었습니다. 
 
노인은 그 종업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자네에게 운영해보라고 지어 주는 호텔일세.”
 
단 한 번의 친절로 3층짜리 허름한 호텔 야간 종업원이었던 그가 이제 1,900개의 객실을 갖춘
뉴욕 한복판 호텔 지배인이 된 것입니다.
그에게 은혜를 갚은 노인은 ‘존 제이콥 아스터’라는 월토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경영자였습니다.
그 종업원의 이름은 ‘조지 C 볼트’입니다.
그는 원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첫 총지배인이 되었고 나중에 ‘호텔왕’으로 불렸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친절을 베풀기 위해 자기 방을 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친절은 분명 자기에게는 불친절입니다. 
자기에게 친절하면 남에게 친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친절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이웃입니다.
자기가 방에서 편안히 쉬면서 손님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아주 가혹하여지라고 하십니다.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자르고 발이 그러면 발을 자르며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에게 친절한 것은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어쩌면 이는 당신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너무 온화하므로 남들에게 차갑게 대하는 것이라는 질책도 될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봄바람처럼 자신에게는 찬 서리처럼.’과 같이 이와 연관된 세상에 떠도는 말이 많습니다.
자신에게 모질수록 타인에게 관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게는
관대한 것입니다.
너무 관대하여 죄를 짓게 되고 그러면 그 죄책감을 무마하기 위해 타인을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절을 베풀어도 그 대상이 보답할 줄 모른다면 어떨까요?
그 친절의 대상이 존 제이콥 아스터였기 때문에 호텔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만약 강도였으면 더 많은 것을 빼앗겼을 수도 있습니다. 친절을 베풀어도 무조건 그 보답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자칫 호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는 그 내용이 명확히는 떠오르지 않아도 금자씨가 13년 동안 감옥에서 친절을 베풀어 그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복수를 도와준다는 것쯤은 기억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절을 베푸는 동안은 금자씨 자신에게는 가혹한 감옥생활이었습니다.
자신이 편하면서 친절을 베풀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반면 금자씨에게 복수를 당하는 백선생은 누구에게도 불친절했기에 자신을 도와줄 친구가 없었습니다.
물 한 잔도 줘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친절은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친절을 베풀어야 끝이 좋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친절할 것인지, 이웃에게 친절하기 위해 나에게 불친절해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기 복수를 위해 의도적으로 한 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수의 맛은 짜릿하지만 결국, 금자씨를 도와준 인물들은 살인자의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친절을 베풀면 사탄과 한패가 됩니다. 해적선에서 친절을 베푼다고 그것이 선행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절대 친절을 베풀어서는 안 되는 게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자아(ego)입니다.
예수님은 타인에게는 관대하지만, 자신에게는 혹독하여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나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되어야만 친절이 가능한 이유는 나도 하나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나에게 그 친절을 다 베풀면 이웃에게 물 한 컵 줄 힘도 사라집니다. 
 
내가 친절을 베푸는 자아는 영원한 뱀입니다. 뱀이 나에게 어떤 보상을 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자아를 뱀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적당합니다. 해적선에서의 친절은 그냥 해적질의 일부일 뿐입니다.
자아에게 친절하여 베푸는 친절은 받으면 안 됩니다. 나를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뱀에 친절하기 위해 베푸는 선악과를 먹어 공범이 되었습니다. 
 
죄를 이길 줄 모르는 사람은 자아와 사탄의 유혹에 친절한 사람입니다.
자아는 자기가 받은 친절을 더 큰 갈증으로 되돌려 줍니다. 
어리석은 친절은 우리를 죄와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사실 이웃도 자아가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 한 컵의 친절을 베풀 때도, 나를 위해서거나 이웃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드리는 친절만이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도 뱀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친절을 투자합시다.
예수님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친절을 온전한 친절로 되돌려 주시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죄짓는 자의 친절을 받거나 그에게 친절하면 그것은 서로의 죄를 무겁게 할 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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