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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9-24 조회수 : 1109

그리스도란? 피를 흘려 피 흘릴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 
 
어느 복음이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누구시냐고 물으신 다음에는 항상 ‘수난 예고’라는 것을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직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그리스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예수님만 십자가에 매달리고 자신들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란 성령을 받아 파견된 자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사랑의 본성을 심어줍니다.
사랑은 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전에도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체로 상징되는 빵을 거저 나누어주신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나눔이 그리스도께는 곧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죽지 않으면 준 것이 아니고 피가 섞이지 않은 어떤 선물도 사랑이 아닙니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생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황제는 국민에게 사랑을 받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중국 황제는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립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서태후가 지목하여 3살 때 부모를 떠나 황제가 됩니다.
나이가 들어도 신발 끈 묶을 줄도 모르고 칫솔에 치약을 짤지도 모를 정도로 완전한 대우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우가 정말 사랑이었을까요? 
 
푸이는 황제로 살고 있었지만 6살 때 시대 상황에 따라 폐위됩니다.
하지만 중화민국이 그에게 생활비를 대주어 그는 아직도 자신이 황제인 줄 알고 호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그 성안에서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실제로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결혼도 자기 뜻대로 하지 못했는데 17살이 된 푸이는 주위 어른들의 강요에 못 이겨 같은 날 2명의 부인을 얻습니다.
이는 자금성 안에서 안위를 누리던 이들이 푸위를 잡아놓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두 여자 중 하나는 아편 중독으로 남의 남자아이를 낳고 다른 황후는 이혼 소송을 제기해 푸이는 중국 최초 이혼남이 됩니다.
 
일본군이 세운 만주국의 황제로 등극하지만 사실 이도 일본군의 꼭두각시 역할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그는 10년간의 감옥생활을 거친 후 식물원 정원수로 일하다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세상에 중국 황제만큼 엄청난 권위와 재산, 그리고 여자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세 차례나 황제였고 많은 여성을 알았으며 청나라의 재산이 한때는 다 그의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선물들 안에 없었던 것이 단 하나 있습니다. 주는 이의 ‘피’입니다.
주는 사람들은 그를 이용하려 그런 선물들을 한 것이지 그 안에 피를 넣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그 사람들은 부모였지만 그는 부모에게서 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받는다고 다 선물이 아닙니다. 
그 선물 안에 피가 들어있어야 나를 살리는 선물이 됩니다.
다 가졌던 남자 푸이는 감옥에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것을 보고는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 모든 것 안에 ‘사랑’이 담겨 있지 않음을 그때는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받는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이렇듯 사랑의 고통이 담겨 있지 않은 선물은 사람을 그냥 껍데기로 만들어버립니다. 
 
달걀도 유정란이 있고 무정란이 있습니다. 
그냥 봐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떤 것은 병아리가 되고 어떤 것은 썩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냥 먹을 때는 영양의 차이는 크게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유정란이 비싼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유정란에 생명력이 더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암탉이 키워진 환경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정란은 아무래도 양계장이 아닌 조금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키워져야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는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피가 들어간 선물과 들어가지 않은 선물이 있습니다.
피가 들어가지 않은 선물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내가 주는 선물에 나의 피가 섞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물질일 뿐입니다. 
 
사실 부모도 죽지 않는다면 자녀를 위해 주는 모든 것들이 사랑이 아닌 그냥 물질일 수 있습니다.
돈 많은 부모가 식모에게 시켜 힘들이지 않고 자녀를 키웠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자녀는 올바로 클까요? 
 
어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여자분은 그렇게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잘 나가는 사람이라 큰딸을 키우는 것보다 일에 더 치중했던 것입니다. 
엄마는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둡니다. 
그래서 동생은 엄마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큰딸은 비록 풍요하게 자랐지만, 자신은 지독한 열등감에 자해까지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구타하는 남자를 떠나지도 못합니다.
돈이 많아서 돈으로 편하게 자녀를 키우면 자녀는 그렇게 자존감 없는 아이로 자라나 힘겨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인들은 고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부모 잃은 아이들을 한데 모아 키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보모들은 기계로 아이들의 젖병을 만들어 아이들이 배고플 때마다 젖을 먹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몸은 편해졌지만, 아이들은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갔습니다.
아이들은 젖을 원하는 게 아니라 피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피 흘림 없는 그리스도가 없듯이, 고통 없는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인데 그 주는 것 안에 내 피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무언가 주면서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이 주는 선물 안에는 그저 그 사람도 줄 줄 아는 사람이 되게 만들려는 뜻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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