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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9-20 조회수 : 913

 9월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루카 9,23-26
 
신앙인과 제자의 차이: 순교자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초점: 잠과 죽음의 순간에 느낄 행복
 
오늘은 한국의 순교 성인들을 기리며 본받기 위해 다짐하며 노력하는 날입니다. 
한국의 성인들은 모두 순교자들입니다. 
순교를 생각할 때 믿지 않는 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순교와 자살의 차이가 뭐죠?”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순교자들의 죽음은 자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는다면 거기에서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그 죽음이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 순교와 자살의 차이가 구별됩니다. 
 
2014년 11월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가족 세 명이 자살을 선택한 일이 있었습니다. 
10월 30일, 50대 이모 씨와 그의 부인, 그리고 12살 딸이 안방에 나란히 누워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들 옆에는 타다 남은 연탄재가 있었습니다. 
딸 이모 양이 계속 학교에 빠지자 담임 교사가 집으로 찾아왔고 문이 잠긴 걸 이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한 것입니다. 
 
경찰은 부인과 딸이 먼저 목숨을 끊고, 귀가해 이를 발견한 남편이 뒤따라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씨는 지난 수년 동안 뚜렷한 직업 없이 주택경매에 매달리다 실패를 거듭해 큰 빚을 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아파트에서 일하던 부인도 두 달 전 직장을 그만둬 마이너스 통장으로 근근이 생활해오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웃 주민은 집도 다 빚으로 산 것이라 이자 내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 곁에는 부인과 딸이 남긴 유서만 놓여 있었습니다. 먼저 부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살아서 발견되면, 응급처치는 하지 말고 그냥 떠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딸의 유서는 이렇습니다. 
“그동안 부모님 말씀 안 들어서 미안하다. 우리 가족은 영원히 함께할 거라서 나는 슬프지 않다. 행복하게 죽는다.”
 
이 양은 힘든 가정형편에도 성실히 학교생활을 해와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습니다.
숨진 채 나란히 누운 이들 가족 옆에는 아빠가 딸과 먹으려고 사 온 가리비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습니다.
 
자살은 살인입니다. 
물론 죽어가면서 회개했다면 모를까, 마지막에 살인하고 죽어서 천국 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양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좀 특별합니다. 
분명 자살이지만 “행복하게 죽는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족이 영원히 함께할 거라서.”입니다.
 
그녀의 죽음 안에는 행복도 있고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믿음도 있고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자살은 자살이기는 하지만 순교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보게 됩니다.
죽음이 행복이 되려면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순교자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행복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후에 올 부활의 영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후대에 남겨 본받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죽을 때 행복하고 행복한 이유를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순교입니다. 
믿었고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도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하시며, 당신 삶에 만족하셨고
그 이유가 이웃사랑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웃사랑은 순교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죽음 앞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저는 결국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하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행복하고 자기 삶을 뒤따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순교의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대비해 지금 자살로 가고 있는지, 순교로 가고 있는지 자신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내 삶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는 그날 ‘잠자리’에서 결정됩니다. 
 
삶이 순교인 사람은 잠자리가 행복이며, 삶이 자살인 사람은 잠자리가 불편합니다.
한 사람에겐 잠이 상이 되지만, 한 사람에겐 잠이 두려움이 됩니다. 
그래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가 잠자리에 누울 때,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날은 순교의 삶을 산 것이고 믿음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이것을 양심이 심판해 줍니다. 
 
어느 주말에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 김범석 씨에게 응급실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에게 치료를 받던 말기 암 환자의 경동맥이 터져서 응급실로 실려 온 것입니다.
보통 이런 상태라면 수술이나 지혈술을 해야 합니다. 쇼크 때문에 심장이 멎으면 심폐소생술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냥 편히 보내주세요.”
그 환자는 이미 치료를 포기할 정도의 상태였고 더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환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현재에만 충실해지려 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큰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였고 자신의 상태를 아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한 달 전 환자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들이 찾아왔습니다. 
아들은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희 아버지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네? 아버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데요?”
“그냥…. 치료하면 좋아진다고 알고 있는데요….”
 
아버지는 항상 “나는 이번에 치료받으면 곧 좋아질 거다.”,
“바쁠 텐데 병원에 따라올 필요 없다.”, “아버지는 잘 이겨내고 있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초점이 죽음이 아닌 지금의 삶에 맞춰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의사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지금 혈관이 터져 돌아가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현 상황을 말해주었고, 아들은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환자는 결국 회사나 대인 관계, 인생 등 정리해야 할 상황이 많았지만 하나도 하지 않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순교자들은 항상 ‘죽음’의 순간에 두었습니다.
그 순간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희생했습니다.
만약 지금의 행복을 위해 죽음의 순간을 잊는다면 그것이 자살입니다. 
 
잠이나 죽음이나 상을 받으러 가는 순간의 마음이라면 그런 사람의 하루의 삶이나 인생은 ‘순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오늘 하루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잠이나 죽음이나 다 부활의 영광을 받는 마지막 발걸음이 됩니다.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초점을 ‘잠’과 ‘죽음’에 둡시다. 
그 순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람이 됩시다.
이것이 순교자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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