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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9-19 조회수 : 1036
9월19일 [연중 제25주일]
 
마르코 9,30-37
 
부모가 자녀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유일한 인생의 방향: 십자가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제자들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당신 수난과 부활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따라야 할 구원의 표지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습관상 하늘을 보기보다는 땅을 보며 걷습니다. 
 
하늘엔 죽어야 산다는 표지판이 있고, 땅엔 그저 이전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이 있습니다.
표지판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인생의 길에 방향이 분명 있음을 믿는 사람이고, 땅을 보는 사람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길을 만든 사람이라면 표지판을 공중에 달아놓는 법입니다.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길을 만들지 않아 방향을 모릅니다.
그래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는 그 끝이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표지판보다는 이전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을 따르려 합니다.
바닥만 보는 사람은 당장 넘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지금의 생존을 위해 소유하고 강해지는 것만을 원합니다.
그러며 서로 누가 더 높은지를 두고 다툽니다.
그러다보니 그 생존경쟁 안에서 이웃에 대한 포용력과 이해력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어린이는 나의 생존에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신경만 쓰입니다.
당시 어린이는 과부처럼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 어린이 때문에 나를 희생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십자가로 자기를 죽이는 삶이 아니면 그런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받아들여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희생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사람이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발걸음을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그런데 걸을 때 땅을 보도록 가르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하늘을 보고 걸으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있습니다. 
 
‘히틀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렇다면 히틀러의 아버지는 히틀러에게 어디를 보며 걸으라고 알려주었을까요? 땅일까요, 하늘일까요?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을 좋아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난폭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출세 지향적 성향’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13살 때부터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생존만을 위해 산 사람이고 그것을 자녀들에게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도 자신처럼 실제적이고 분별 있고 현실적이며 비종교적이고 비정치적이며 안정적이고 근면한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서 마찰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아버지에게 심한 폭력을 당하며 컸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망하자 미술의 꿈을 꿉니다.
그러나 미술에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엔 아버지의 발걸음을 쫓아갑니다. 
 
아버지의 소원대로 군인이 되어 고위 공무원 자리에 오르고 결국 독일 총통이 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그렇게라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까요? 히틀러가 군대에서 마치 아버지처럼 인정받기 전까지는 무엇을 해도 사람들과의 충돌 때문에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총통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큰일을 벌이게 됩니다. 
 
방향이 없는 길은 없습니다.
인생도 동물처럼 그저 생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어진 길이 있다고 믿는다면 하늘을 보게 해야 합니다. 하늘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달려있습니다.
죽어야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생존만을 위한 삶은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만든 사람이 표지판도 만듭니다. 
그리고 표지판은 항상 공중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방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달에도 있고 별에도 있고 표지판도 그렇고 등대도 그렇습니다. 
생존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자녀에게 삶의 표지판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사람입니다. 
 
히틀러와는 반대로 이 시대에 가장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마더 데레사’의 부모님은 어땠을까요? 
마더 데레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지역 유지였고 교회에 많은 후원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10살 때쯤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는 어머니에게 키워졌는데 그 어머니는 십자가를 지워주는 분이셨겠습니까, 아니면 치워주는 분이셨겠습니까? 대답은 정해져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이렇습니다. 
 
“어머니를 떠오를 때마다 ‘거룩’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말씀과 행위가 거룩했기 때문이지요.”
어머니는 힘든 생활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을 곤경에 처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때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고, 말이 아니라 실제로 알코올 중독 여성, 버림받은 노파를 돌봐줌으로써 행동으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가난한 사람들이 문가에서 음식을 청할 때 자신도 먹을 것이 모자라도 반을 떼서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애들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때는 말 없이 하여라. 바닷물 속에 돌을 던지듯 말이다.”
 
선행하고 알리지 말라는 말은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18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께 하느님께 온전히 속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하루 동안 홀로 기도한 후에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얘야, 예수님의 손을 꼭 잡아라. 죽을 때까지 그분과 함께 해라.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려무나.
성모님은 네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거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표지판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부모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 그리스도임을 믿고
그분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인간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합니까?
길을 만든 사람은 길 위가 아니라 하늘에 방향을 표시합니다. 
 
인도의 ‘디팩 쵸프라’는 아들 둘에게 어렸을 때부터, “너희는 어떻게 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지만을 생각해라.
나머지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게.”라고 가르쳤습니다. 
큰아들은 학교도 안 가고 마을 어른들을 도와주다가 큰 사업가가 되었고, 둘째는 학교에서 꼴찌들에게 공부 가르쳐 주다가 하버드 교수가 되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창조의 법칙을 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창조자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창조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녀들에게 바로 그것을 바라보도록 교육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무엇을 바라보도록 교육합니까? 이웃의 행복입니까, 당장 나의 행복입니까?
많은 자녀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법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땅만 보고 교육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를 지게 할 수 있을 때 정말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이웃과도 행복하게 지내며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자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게 되면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만든 부모 자신의 책임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군대 있을 때 상관이 두릅이 많다고 따러 들어가자고 해서 쫓아 들어갔다가 지뢰를 밟아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지뢰밭이라는 표지판을 못 보고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땅은 생존을 위한 집착의 상징입니다. 
하늘은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입니다.
죽어야만 살 수 있다는 유일한 진리와 생명의 길을 알려주는 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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