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8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루카 8,4-15
신앙인과 제자의 차이: 믿으려는 사람과 알려는 사람의 차이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시는데, 군중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해석’해 주십니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단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비유는 항상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일종의 ‘법칙’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밭에 보물이 묻혀 있다면 그 밭을 사기 위해 모든 재산을 판다는 것이라든지,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끌어낼 비유는 어떤 효과를 줄까요? 그런 법칙을 만든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만듭니다.
집단 카드섹션 하는 것을 보면 그 안에 어떤 법칙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그 법칙을 만든 사람이 있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설’(說)을 믿는 사람과 ‘론’(論)을 믿는 사람, 그리고 ‘법’(法)을 믿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설을 믿는 사람은 어떤 개인의 주장을 믿는 것이고, 론을 믿는 사람은 어떤 집단의 이론을 믿는 것이며, 법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지식이고 믿음입니다.
그러나 ‘법칙’만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끕니다. 따라서 ‘비유’는 이런 법칙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을 유일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씀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먼저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계심을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이치나 법칙은 더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이미 주님이 계심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이치를 통해 ‘왜?’를 묻습니다.
왜 그런 이치를 깨닫게 하셨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처럼 그 이치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존재를 드러내시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법칙을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잘 만들어진 카드섹션만 보며 그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감독한 사람의 의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유를 통해 그 비유를 만든 이를 ‘알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따로 비유 말씀을 설명해주신 이유는 당신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짧은 애니메이션 단편영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제목은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2008)입니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주인공인 여자는 도시에서 가장 싼 집을 구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의 집은 도시의 철거 작업으로 거대한 크레인에 의해 공중으로 들러져 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철거 회사의 파업으로 철거가 중단되어 결국 그녀는 그 공중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바람만 불어도 위태위태한 공중에 들어 올려진 그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고양이로 변해버린 전 남자친구입니다.
사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도시는 온통 고양이들의 세상입니다.
그나마 자신을 찾아오는 유일한 사람인 전 남자친구를 위해 매번 파이를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파이를 먹으면 생선을 구워주는 여자를 생각하고 떠납니다.
또 파이가 먹고 싶으면 다시 찾아옵니다.
여자는 이 관계에서 결국 고양이 남자에게 잡아먹힌다는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내용일까요?
달동네로 이사 온 한 여인은 도시에 살지만 도시 사람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동떨어진 삶을 삽니다.
도시 사람들은 고양이로 보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줄 때만 다가오지만 언제 할퀴고 달아날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보입니다.
그나마 자신을 찾아오는 유일한 전 남자친구도 욕망에 사로잡힌 고양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에게 먹히고 맙니다.
자신도 이젠 도시의 고양이들 일부가 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과 벗어난 존엄성 있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돈과 성욕, 힘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살면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도 그런 고양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매우 공감이 가는 애니메이션이니 한 번 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씨네몽땅’에서 이 영화를 논평했습니다.
제목이 ‘욕망의 도시에서 가장 싼 집에 사는 여자가 겪게 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이 작품의 감독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결국, 이 작품은 감독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박지연 감독이 혼자 서울에 정착한 지 7년이 되었던 2008년 제작한 애니메이션입니다.
서울에 살게 된 뒤 도시에 관한 특별한 정서를 갖게 된 감독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내면세계를 이미지화해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냥 박지연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작품을 박지연 감독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단순히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서
박지연 감독을 더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듣는 그리스도의 비유는 제가 하는 강론과 같습니다.
이 묵상들을 들으시는 분들은 비유를 먼저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결국, 묵상들은 제가 저에게 하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 묵상이 좋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부님은 참 솔직해서 좋아요.”
저는 제가 솔직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묵상을 보시는 분들은 묵상을 통해 저를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는 것이겠지만 결국 당신 자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상할 때 그리스도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것까지 가지 않는다면 아직 군중의 수준에 머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그러나 요한복음은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아는 것’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넘어서서 아는 수준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몸뚱이입니다.
몸만큼 머리를 아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어야 그분께서 더 깊은 묵상을 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더 드러내 보이시고 하느님을 더 이해하는 만큼 세상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 깊은 묵상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여겨
먼저 매사에 그분의 몸이 되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당신에 대해 다 알려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 더 가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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