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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9-10 조회수 : 1080

부모가 눈먼 인도자가 될 가능성이 큰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먼 인도자’들을 질책하십니다. 
눈먼 인도자들이란 자신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들보란 ‘자아’를 뜻합니다. 자아를 보지 못하면서 행동만 잘하려는 사람은 ‘회칠한 무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속은 썩은 시체로 가득한데 겉만 번지르르해서 그 모습을 따르라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남을 심판한다.’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도자는 남을 심판하는 대신 그 사람 안에서 사랑받지 못해 화가 잔뜩 나 있는 자아를 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스승을 따라야 합니다.
스승 없이는 누구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첫 번째 스승은 부모입니다.
아이들이 저절로 잘 성장할 것으로 믿거나, 자신을 닮으면 된다고 믿으면 눈먼 인도자입니다. 
 
부모가 눈먼 인도자라면 자녀들은 부모와 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빨리 올바른 인도자를 만난다면 그런 부모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녀의 스승이 부모에게만 머무른다면 아무래도 완전해지기는 어렵습니다. 
 
의사 김범석 씨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는 말기 암 환자가 된 한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두 딸의 상반된 자세가 나옵니다. 
‘혈연이라는 굴레’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우리에게 스승이라는 굴레가 단지 부모에게만 한정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환자는 식도암으로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호스피스 상담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 환자는 불평만 늘어놓았습니다.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병원 밥이 너무 싱겁다는 둥, 병실 침대에서 냄새가 난다는 둥, 옆 침상 환자가 시끄럽다는 둥 도저히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녀는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 딸이 둘 있기는 한데…. 연락하기 좀 그래요. 다들 바빠서….”
 
이런 식의 식도암 환자들은 대부분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 수준으로 술을 마셔서 생긴 병일 경우 아내나 자녀에게 좋은 남편, 아버지일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다행히 큰딸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큰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환자는 예상보다 더 나쁜 아버지였습니다.
늘 술을 마셨고 도박으로 돈을 날렸고 술집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가족을 때렸습니다.
어머니는 늘 맞으며 버텼고 딸들과 먹고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벌어온 돈으로 아버지는 다시 술을 마셨고 여자와 놀았고 노름을 했습니다.
이런 일은 끝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두 자매를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참았습니다. 
 
20년 가까이 지나 딸들이 성인이 된 뒤 어머니가 이혼을 원했을 때, 아버지는 위자료를 요구하며 끝내 이혼해주지 않았습니다.
여동생은 아버지와 의절한 뒤 일찌감치 독립해서 살았고 집안의 어떤 일에도 엮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을 참기만 하는 어머니도, 그런 부모를 감당해내는 언니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큰딸의 몫이었고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큰딸도 새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신혼 때도 찾아와 돈을 요구했고 그래서 사위와 크게 싸운 뒤로는 더는 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인연이 무엇인지 여동생은 장례 때도 절대 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큰딸은 아직 ‘부녀’의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의사 앞에서 한없이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큰딸과 작은딸의 스승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큰딸의 스승은 당연히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를 좋아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싫지만 싫다고 하지 못하고 인연의 굴레에 매여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버지와 같은 남자를 만나 똑같이 참고 살 가능성이 큽니다.
의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심지어 현재 결혼 생활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온 남편은 그녀의 아버지인 환자를 닮아있었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녀는 그 자체만으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인생은 자꾸 반복되고 있었다.”
 
물론 작은딸은 의사가 만나보지 못해서 어떻게 사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작은딸의 스승은 아버지입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장례도 오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아마 결혼했어도 가정에서 아버지와 같은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았어도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용서를 가르친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승을 찾아 그 스승을 닮아가면서 성장합니다.
자녀를 참 스승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줄 수 없는 부모를 만났다면 그 자녀들은 두 부모 중 하나를 닮을 확률이 높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닮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빨리 자신보다 더 나은 스승을 사랑할 수 있도록
봉헌하는 일입니다.
참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온전한 스승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부모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키울 때는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보다 더 낫게 키우려고 하고 돈 걱정을 하며 그것 때문에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다를까요? 노후 걱정과 자존심 때문에 자녀가 성공하도록 돕고 싶은 마음과 그래서 가난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거지로 사는 것도 좋다는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않는 한
그냥 어쩔 수 없이 세상 걱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 걱정하게 만드는 게 자아입니다. 자아는 들보처럼 나의 눈을 가려 눈먼 인도자가 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참 인도자로 따라가는 들보를 끼고 사는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스승이 되신 분은 예수님과 성모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눈먼 인도자로서의 우리 한계를 직시하고 겸손하게 자녀들이 부모를 닮게 만들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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