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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9-08 조회수 : 1492

무소의 뿔과 같으신 분
 
오늘은 성모 마리아의 지상 탄일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는 오늘 복음 말씀대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도우셨기 때문에 구원의 또 다른 협력자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족보로 시작하며 성모님을 통한 그리스도의 탄생이 처음부터 계획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 족보 안에 들려면 그에 합당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성모님은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셨을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큰일을 한 사람일까요? 
『숫타니파타』라는 불교 경전에서는 깨달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저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렇게 깨달은 분은 우리 주위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 김범석 씨가 자신이 본 죽음 중에 ‘특별하고 위대한 마지막’이란 제목으로 쓴 글이 있습니다.
수많은 죽음을 본 그가 어떤 죽음을 가장 특별하고 위대하다고 보았을까요? 
 
그는 폐암 말기 어머니를 돌보던 딸의 편지를 인용합니다. 
“엄마가 폐암 진단을 받고 많이 힘들어하셨는데 이제는 많이 다잡으셨어요. 선생님을 믿고 따르면서 저희 정말 열심히 치료받겠습니다.
우리 엄마 꼭 낫게 해주세요.”
 
수술은 할 수 없는 상태라 생명 연장 수단으로 항암치료를 받자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말할 때
수많은 반응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편지 속의 ‘우리 엄마’는 3주에 한 번씩 항암을 하면서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도 않고 싫은 기색도 없이 시키는 대로 순종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마지막을 딸과 함께 지내기 위해 딸의 아파트 옆으로 이사와 손주들을 돌봐주고 손주들과 놀아주고
맞벌이하는 딸 가족을 위해 밑반찬도 해주고 주말엔 김밥을 싸서 북한산 등산을 하고 하산 길에 사우나에 들르는 등 다른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는 매우 일상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길어야 1년이고 매우 고통스럽다는 폐암 말기였는데도 어머니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일상을 사셨던 것입니다.
딸은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엄마는 치료 의지가 매우 강해서 힘든 내색 안 하고 열심히 잘 치료받고 계세요. 일상생활도 아주 많이 잘하고 계시고요.
다른 분들도 잘 견디시는 건가요? 힘든데 저희 때문에 내색 안 하고 혼자서 참고 있으신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그렇게 암은 머리까지 전이되었고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 “방사선치료를 했는데 효과가 좋지 못하네요….”라고 말하면 환자들은 수많은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선생님이 잘 치료해주려고 이렇게 애썼는데 미안해요.”
 
할머니는 오히려 말하기 주저하는 의사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상태가 나빠졌다면 자기 탓으로 모든 것을 돌렸습니다. 
 
그때 의사는 알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항암제를 몇 번 바꿔야 하는 적도 있었는데 그런 때도 할머니는 화를 내거나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서도 할머니는 마치 남의 일인 양 자기 죽음에 대해 아무런 동요가 없었습니다.
무척이나 평온했고 담담했습니다. 
한 가지 손주들이 자신 없이도 잘 클 수 있을까가 걱정이지만 어차피 한 번 겪어야 하는 일이니 자녀들도 씩씩하게 잘 헤쳐나갈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담배도 피운 적 없는 할머니가 폐암에 걸려 딸 옆에 살면서 1년 동안 남과 다를 게 없는 일상을 사시다
할머니는 그렇게 평온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수많은 죽음을 지켜본  김범석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글을 마무리합니다. 
“할머니가 실제로 돈이 많았는지 대학은 나왔는지 그런 것들은 알지 못한다.
짐작하건대 가방 끈이 길지도 않았던 것 같고 넘치게 부유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역사책에 나올 법한 위인도 아니고 언론에서 칭송받을 만한 이력이 있는 분도 아니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평범한 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누구보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일,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을 받아들이고 본인 몫의 남은 삶을 평소처럼 살아내는 일.
 
누군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지켜본 그 노년의 환자는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분이었다. (중략) 
할머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특별했고 보통 사람이지만 위대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성인은 큰 업적을 낸 인물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집착 없이 순리에 따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버리니 두려움도 없고 집착도 없고 모든 것에 ‘순응’(아멘!)합니다. 
 
진정 할머니는 암이라는 사형 선고에 놀라지 않았고, 세상 집착에 걸리지 않았으며, 분노와 원망을 하며
진흙에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 죽음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성모님은 그렇지 않을까요? 성모님도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사자는 소리에 놀라지 않습니다.
어떤 소리건 자신을 위협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신을 놀라게 한 것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지만,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알리며 설득하지 않습니다. 
 
또 성모님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분이십니다. 거침이 없으십니다.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듣고는 늙은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갖느냐고 했지만 성모님은 당신은 주님의 종이니까 그냥 말씀대로 이루어지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이 없으니 거침도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어도 성모님은 골고타 끝까지 예수님과 동행하십니다. 
 
성모님이 그렇게 두려움도, 거침도 없는 분이신 이유는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지만 그 더러움이 연꽃에 물들지 못합니다.
성모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자신을 봉헌하셨기에 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안나와 요아킴은 성모님이 어렸을 때 성전에 봉헌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맡겨진 사람은 죄에 물들지 않습니다.
죄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을 죄에 물들게 만들 수 있는 유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야를 달리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는” 성모님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른 이들과 친교를 맺지 않고 독단적이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봉헌되고 자아가 죽어 두려움도 없고 거칠 것도 없고 죄도 짓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치 코뿔소로 상징되는 주님의 ‘도구’가 되어 주님 뜻대로 달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코뿔소의 ‘외뿔’은 코뿔소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외뿔처럼 ‘코뿔소의 도구’가 되려면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고 이런저런 상황에 좌절하며 세상 죄에 물든 사람은 누구도 코뿔소의 외뿔이 될 수 없게 됩니다. 
코뿔소가 썩은 외뿔을 굳이 장착하고 달릴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코뿔소가 주님이라면 외뿔은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찾아가실 때 그분을 그쪽으로 달리게 만든 것은 태중에 잉태된 코뿔소인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코뿔소는 또한 세상에서 외뿔이 없으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코뿔소라는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장착된 외뿔이십니다.
성모님은 우리도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가라고 어머니로서 모범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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