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되어서도 남의 눈치만 보면서 힘들게 사는 자신이 너무 싫었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로이트의 책을 통해, 특히 유아기를 비롯한 과거가 현재 자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을 통해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려졌습니다.
어머니에게 자주 맞은 기억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을 맞으며 대성통곡하며 우는 아이의 모습이, 맞지 않기 위해 눈치 보는 아이의 모습이, 함부로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했던 아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지금의 자기 모습이 어머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찾아가 화를 냈습니다. 왜 나를 때렸냐고, 왜 나를 학대했냐고 따졌습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아주 힘든 상태였습니다. 일과 양육을 도맡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의 행동을 그냥 놔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들을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폭언을 들으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실 과거의 기억은 종종 조작됩니다. 이 형제님처럼 사랑의 행동은 지워지고 폭력의 무자비함만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종종 과거에 의해 나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금의 내가 과거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것이 틀렸기에 현재가 고통스러운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우리는 이 선택을 보면서 배신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왜 뽑았을까를 생각합니다. 배신할 것을 미리 알고서 뽑으신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필요한 제자들이었고, 그들을 뽑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 선택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산에 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까지 하십니다.
이 과거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주님의 뜻에서 멀어진 유다 이스카리옷의 잘못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역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는 삶이 아닌, 지금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으로 지금에 문제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아닌, 지금의 충실함으로 과거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택을 잘못된 선택인 것처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지금 모습 때문입니다. 주님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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