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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9-04 조회수 : 1247
9월4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루카 6,1-5
 
그리스도인의 세 부류: 바리사이-율법학자-제자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어제 복음은 단식에 대한 원칙주의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되는 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 법에 관해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남의 밭에서 밀이삭을 훔쳐 먹은 당신의 제자들을 두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말은 크게 두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겠는데,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주인이시기에 율법을 지배하는 분이시지, 그것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것과 율법을 그 주인을 위해 지킨다면 그것이 바로 참다운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대치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세 부류 모두 율법에 충실해지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바리사이는 율법적인 ‘행위’에 집중하는 이들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율법의 행위가 자신이라고 여기는 이들입니다.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면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집중합니다. 이들은 ‘위선자’라 불립니다. 
 
그다음 율법학자는 ‘원칙주의자’입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꼭 해야 하는 의무만 철저히 수행하면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율법 조항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독선적일 수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율법에 어긋나는 삶을 살지 않지만, 자신처럼 살지 않는 타인을 심판합니다. 
물론 바리사이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참다운 율법의 정신을 잃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뜻에 집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하고 허락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볼 때 이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라 예측 불가입니다.
심지어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 마음의 안식을 누리는 이들입니다. 
 
이제 소설 하나를 소개시켜 드릴 텐데 누가 바리사이고 누가 율법학자이며 누가 주님의 제자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아버지의 강요로 돈도 많고 나이도 많은 의사 칠링워드와 결혼합니다. 
헤스터는 남편의 권유로 영국을 떠나 먼저 미국 보스턴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합니다.
곧 뒤따라오겠다던 남편이 세월이 꽤 흘러도 오지 않자 그 마을의 인기 있는 목사인 딤스데일과 불륜을 맺고
딸 펄을 낳습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가 아기를 낳자 동네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에 붉은 ‘A’를 새기고 3시간 동안 교수대 위에서
딸을 안고 만인의 구경거리가 되게 합니다.
‘A’는 ‘간통’을 의미하는 ‘Adultery’의 약자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동안 그녀는 항상 가슴에 붉은 ‘A’를 붙이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절대 자기 불륜의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A’를 ‘Able’(능력 있는)로 읽을 정도로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돈을 벌어가며 딸 펄을 잘 키웁니다. 
 
그러던 중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드가 도착합니다. 아무도 칠링워드가 헤스터의 남편인 줄 모릅니다.
칠링워드는 헤스터의 불륜을 파헤쳐 결국엔 그 상대가 존경받는 딤스데일임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그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기 전까지 그는
그 괴롭힘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딤스데일은 속이 썩어들어갑니다. 
 
7년이 지난 뒤 헤스터는 딤스데일에게 함께 도망치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딤스데일은 이미 죄책감에 속이 문드러져서 육신까지도 망가졌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딤스데일은 헤스터가 섰던 그 교수대에 올라 설교를 마치고는 자신이 헤스터의 내연남이었음을 밝히고 죽습니다.
그의 옷 속에도 붉은 ‘A’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바리사이는 누구일까요? 
바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솔직할 수 없었던 딤스데일 목사입니다. 
율법을 어겼지만, 그 책임을 사람들만 모르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소설에서는 설교 중에 간간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더 겸손하게 보이게 만들어 인기를 더 얻게 됩니다. 
남이 볼 수 있는 행위에만 치중하는 이는 절대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딤스데일이 마지막에 자신의 죄를 사람들 앞에 고백하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는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게 하려고 주홍글씨를 헤스터만 달고 살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바리사이는 솔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율법학자는 누구일까요? 헤스터의 남편인 칠링워드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딤스데일의 불륜관계를 알아채고는 목사를 계속 괴롭힙니다.
그래서 그가 죄책감으로 쓰러지게 만듭니다. 
 
그는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봐 줄 수 없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가 정의를 실현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아내와 딤스데일을 용서하고 다시 잘 살아나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헤스터일 수 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딸을 잘 키워야 했기에 그녀는 죄인이라는 명패를 가슴에 달고 열심히 일하여
현 상황에서의 최선을 찾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지금 이 상황에서의 최선은 남에게 잘 보이는 것이고 원칙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황에 발 빠르게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합니다. 
헤스터와 같이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참 주님의 종입니다. 
 
성당에서도 이런 세 부류의 신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신부님이 볼 때만 열심히 봉사하는 척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행동이 달라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느 부류에 속할까요? 당연히 바리사이입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반면 누가 보든 말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융통성이 없습니다.
자신처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함으로써 자신이 타인들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율법학자입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본인이 죄인으로 찍힐 것을 알면서도 바로 그 순간 해야 할 일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율법이고 뭐고 없습니다.
율법의 주인은 하느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몸 – 이성 –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몸에 집중하는 사람은 바리사이입니다. 
사람은 몸이 다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시선에 집중하는 삶을 삽니다. 
 
이성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믿습니다. 이들이 율법주의자입니다. 
율법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행위입니다.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뜻’에 집중합니다. 
뜻은 행위의 의도와 목적에 해당합니다. 
그 행위가 누구의 뜻,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집중합니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했더라도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일 때 그런 행위는 하느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를 당신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공부를 참 잘하고 왔을 때,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를 했다고 하거나, 그냥 자기만족을 위해 공부했다고 하면 아버지 마음은 어떨까요? 
기껏 먹여주고 키워주었더니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한다면 계속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별로 안 생길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보답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할 때 자녀가 사랑스럽습니다. 
 
바리사이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과 같고,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율법학자요 원칙주의자이며, 아버지를 위해 공부한 아이는 주님의 종이요 제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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