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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3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8-31 조회수 : 1613

나는 어떤 권위?: 몽둥이-논리-피
 
오늘 복음은 ‘권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회당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낫게 하는 것에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영’에 관련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구조는 ‘육체-혼-영’으로 되어있습니다. 
육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고, 혼(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으며, 영(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란 상대를 나의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누구나 권위를 가지고 산다고 믿을 텐데 우리는 인간의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권위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가장 낮은 단계의 권위. 사실 권위가 없을 때 사용되는 권위입니다.
소위 ‘폭력’이라고 하는데 몸을 움직이는 데 사용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득할 머리도 없고 그저 힘만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권위입니다. 
 
궁예는 바닥에서 시작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궁예는 폭군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미륵불이라 자처하며 부처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 옛날 원효는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불법을 다 알 수 있다고 하였느니라.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주문이 있노라.
그대들은 모두 외울지어다.
집에 있을 때나 일할 때나 잘 때나 일어났을 때나 모두 외울지어다. 옴마니 밤매훔을 외울지어다.
이것은 석가도 알았고 나도 알았던 불경의 모든 것이니라.
이 주문이 그대들을 이 지옥에 땅에서 극락으로 이끌 것이니라.
옴마니 밤매훔, 옴마이 밤매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인가?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말이야!”
한 신하가 기침을 하며 말합니다.  
“소인이옵니다. 폐하.”
“참으로 딱하구나. 짐이 지금 관심법을 하고 있는데 어찌 기침을 할 수 있느냐, 이 미련한 것아.”
“송구하옵니다,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가만해 보니 네 머리에는 마군이(불도를 방해하는 온갖 번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가득 찼구나.
여봐라. 저자 안에 있는 마군이를 때려죽여라!”
 
이렇게 신하뿐만 아니라 여인들까지도 철퇴로 죽이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왜 폭력을 쓸까요? 말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왜 말로 안 될까요? 설득시킬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녀에게 폭력을 쓴다면 그것은 말로 설득할 논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자기 힘으로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문제입니다. 
 
두 번째 권위는 논리로 설득하는 사람입니다. 
역시 자기 힘으로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폭력을 쓰지 않고 논리적인 설득력을 사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설득력도 항상 한계를 지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머리를 따르지 않고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컬투쇼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요즘 유행한다는 부모교육을 두 시간 동안 듣고 돌아온 엄마가 아이들에게 윽박지르지 말고 ‘… 구나’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실천방법을 터득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유치원 다녀온 아이가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려 하자,
“너 배가 아주 고팠구나. 그런데 손을 먼저 씻어야겠지? 손을 씻고 먹으면 더 맛있겠구나.”라는 식으로 항상 설득하는 투로 말했습니다.
항상 이렇게 아이를 설득할 때, 그날도 “친구와 싸웠구나. 친구와는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냐하면….”이라고 하는데, 아이는 어느 날 귀를 막고는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해. 그만해. 그냥 때려. 그럼 그냥 할게.”
 
우리가 머리로 이해한다고 그것을 다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죄 안 지어야 하는 것을 몰라서 죄지을까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바뀌어야 바뀝니다.
그래야 이해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바꿀 줄 아는 힘이 가장 큰 힘입니다. 
 
마음엔 무엇이 살까요? ‘욕구’가 삽니다.
우리를 조정하는 것은 이 욕구입니다.
그런데 욕구는 ‘본성’입니다.
태어날 때 부여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세속-육신-마귀의 본성을 타고났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바꾸는 방법은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는데, 새로 태어나려면 새로운 부모가 주는 ‘양식과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 양식과 가르침을 성체와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가장 큰 권위는 나의 욕구를 바꿔줄 양식과 말씀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새로 태어나게 하려면 그보다 더 높은 하느님 본성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임금이 있어도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지닌 미실이라는 여인의 캐릭터가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을 치려는 임금과 많은 군사 앞에서 그녀는 화랑들을 이끌고 나옵니다.
그녀가 화랑을 관장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금과 군사들 앞에서 ‘낭장결의’(화랑들이 화장하고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세우는 일)를 하고 할복하자 임금과 군사들은 칼을 집어 던집니다.
미실의 ‘권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미실은 당시 귀족의 아들들을 자신의 한 마디에 할복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미실이란 여인이 그들을 위해 죽어줄 수 있는 사람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드라마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권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곧 성령입니다.
그 성령으로만 우리 마음을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위가 있으셨던 이유는 당신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정치적 권위를 얻으려고 경선도 하고 상대를 공격하기도 하며 노력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는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권위입니다.
먼저 생명이 아닌 십일조라도 기쁘게 내어놓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권위가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권위의 시작일 것입니다.
 
피는 흐름입니다. 본래의 본성은 소유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흐르게 할 수 있다면 이미 영적인 권위를 지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는 자녀에게 소유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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