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히’ 사는 사람은 죽음도 ‘막연해서’ 두렵다.
루카는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 소명을 선포하는 사건이 나자렛에서 일어난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는 요셉이 메시아가 되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선입관에 사로잡힌 교만을 지적하시고 그들은 그런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두려움 없이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소명을 선포하는 것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은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누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를 주님 뜻에 따르며 자신을 버린 삶을 사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냥 조금 더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일까요?
말기 암 환자들을 많이 접한 경험을 책으로 쓴 김범석 작가가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라는 책에 소개한 두 명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말기 암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70세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은 힘들 거 같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 환자는 담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들어본 바로는 거창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 일들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진작에 그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며 떠났습니다.
김범석 선생을 찾아온 다른 노인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기대수명을 듣고는 딱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지나친 기대였습니다.
평균적으로 그는 당해 추석도 넘기기 힘들다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꾸만 ‘10년만 더’를 말했습니다.
물론 모른 척하고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환자가 의식이 없어지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환자가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도 인생의 귀중한 일부로 만들고 떠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
침묵이 흘렀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학교 들어갈 때 교복 한 벌 해 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
“...”
여러 번의 질문에도 그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특별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일주일에 하나씩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이례적이라고 합니다.
사실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엇에 기쁘고 슬픈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른 채 그저 막연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의사는 앞 환자의 예를 들어 그분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다음 외래에 올 때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만 생각해오라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웃을 일 만들기, 핸드폰 사진 매일 찍기, 일주일에 세 번 산책하기, 자식들에게 하루에 한 통 문자 보내기, 아내에게 매일 고맙다고 말하기 같은 소소한 것이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숙제가 너무 어려웠는지, 너무 평범해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인지, 그는 다음 외래에도 빈손으로 왔고 그렇게 주저하다 추석을 넘기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이 두 사례 중에 죽음을 덜 두려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 사람이 죽음이 두려워 하루하루 충실히 살려고 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삶이 막연하니 죽음도 너무 막연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반면 삶이 해야 할 일로 채워지면 죽음도 해야 할 일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삶이 명확할 때 죽음도 명확해집니다.
어느 독특한 월터란 물리학 교수의 동영상이 있습니다. 그는 물리 공식에 광적으로 미쳐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월터 교수는 물리학 수업을 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은 강의실 안에서 실제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루는 월터 교수가 살짝 더 이상했습니다. 15kg 되는 추를 자신의 턱에 갖다 대고 놓는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운동에너지 보존법칙을 100% 확신해요.
나 자신은 믿지 못할지라도. 조용히 해 주세요.
장난이 아닙니다. 어제 잠을 거의 못 잤더니 힘드네요. 셋, 둘, 하나.”
추가 다시 돌아올 때 턱이나 목이 부서질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믿는 물리학 법칙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에너지 법칙에 따라 추는 자신이 놓은 그 자리 이상 올라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보는 사람도 짜릿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삶의 법칙을 주십니다. 당신 뜻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란 법칙입니다.
그리고 그 법칙대로 살다 보면 하루하루가 정말 빡빡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법칙대로 삶의 일부인 죽음도 주님 뜻대로 받아들이면 행복으로 끝날 것을 알게 됩니다.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월터 교수처럼 하루하루가 짜릿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에 오류가 없음을 체험하며 기뻐합니다.
‘오늘은 뭐 하며 살지?’라는 식으로 절대 하루를 막연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분명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전날 잠들기 전에 다음 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래서 꼭 해야 할 일을 두 가지에서 많게는 여섯 가지 정도 정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정한 대로 기계처럼 움직이며 먼저 두 가지는 꼭 하십시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항상 기쁨으로 끝난다는 것을.
그리고 죽음조차도 하나의 소명임을. 그리고 그 죽음 뒤에 가장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그렇게 우리는 죽음 앞에서까지 담대할 수 있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 뜻에 나를 맡기고 마지막 날이라도 기쁘게 살아갑시다.
하느님 뜻에 살짝 미치면 죽음까지 포함한 매일의 삶이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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