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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8-21 조회수 : 1652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
그리스도의 품성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다만 모세가 했던 말을 되풀이할 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은 없었습니다.
대리자에게 중요한 것은 가르침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대리자의 자질 중 가르침보다 행실이 더 중요합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제에게 기대하는 것은 좋은 강론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성품일까요?
성품이 그리스도답지 않다면 가르침은 따르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품만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았다면 가르침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조사에서 신자들이 사제에게 바라는 사제상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강론 잘하는 신부, 기도 잘하는 신부, 겸손한 신부 중 어느 것이 1위였을까요?
1위는 겸손한 신부, 2위는 기도하는 신부, 3위는 강론 잘하는 신부였습니다.
가르침이 꼴찌이고 성품이 1위입니다.
 
신자들은 사제들에게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우선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신학생들은 강론 잘하는 신부를 가장 바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으면 말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말을 가장 잘하는 사제와 이태석 신부님이 살아계신다면 이태석 신부님을 만나러 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위치에 서면 신자들이 강론 잘하는 사제를 더 좋아할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교구 사제의 주보 성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강론을 엄청나게 못 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공부 자체를 못 한 분입니다.
라틴어 때문에 사제가 못 될 뻔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항상 일주일 전부터 주일미사 강론을 글로 써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이미 써 놓은 강론 원고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미사 시작할 때부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강론시간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만 하고 앉았습니다.
더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람들은 이 강론을 최고의 강론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거의 냉담하던 시골 마을에 온 비안네 신부는 하루에 17시간 정도를 고해소에 앉아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인품을 보았기 때문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하지만 인품이 바탕이 되지 않은 강론은 어떨까요?
아무리 멋진 강론이라도 신자들은 “신부님 말 잘하시네!” 정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나 스승으로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를 ‘대리’하는 것이 아닌 ‘대치’하려 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인품을 먼저 닮으려 하지 않으면 그것은 대리자가 아니라 모세를 대치하려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 모세만큼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고 나옵니다. 
 
미국 한 개신교 예배 시작 30분 전에 아주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한 거지가 교회에 나타나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오직 세 명만이 그 사람에게 간단하게 인사했을 뿐 어느 사람도 그 사람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사람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당신은 앞에 앉을 수 없다면서 맨 뒤 자석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찬양이 끝나고 교회 장로님이 나와 새로 오신 담임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목사님은 예레미야 스피크입니다. 나오셔서 설교해주시겠습니다.”
 
모든 성도는 일제히 일어나 새로 오신 목사님을 환영하는 손뼉을 쳤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강대상에 없었습니다.
맨 뒤에서 정말 냄새나며 주변을 돌아다니며 돈을 달라고 했던 그 거지가 강대상으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았습니다. 박수 소리는 조금씩 사그라들고 웅성거렸습니다. 
 
예레미야 목사님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내용은 마태오 복음 25장 34~40절 말씀이었습니다.
 
심판 때에 주님 오른쪽에 서게 될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성도들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곳곳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오늘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모임을 보았지만, 하느님 자녀가 모인 교회는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라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으면 말씀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면 가르침도 변질합니다.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처럼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이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품 중 닮아야 하는 것은 온유함과 겸손입니다.
이 안에 가난도 포함됩니다. 
마음이 인품입니다.
이것이 먼저 드러나지 못하는 강론이란 음식을 더러운 그릇에 주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에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거짓 모세의 대리자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그분을 보여주고 그런 다음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신자들도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지 그분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은 말을 듣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다면 차라리 그 순간에는 입을 다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은 유창한 말이 아닌 그분의 성품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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