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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8-19 조회수 : 1734

사랑이 하느님임을 모를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드님의 혼인 잔치를 위해 많은 이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돈을 버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임금의 사랑을 거부한 것에는 ‘사랑’을 자기 마음대로 정의한 원인이 큽니다.
자기 기준으로 임금의 사랑을 정의한 것입니다. 
 
초대에 응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임금이 그들을 사랑하여 초대하였지만, 그는 자기가 와 줘야 잔치가 잔치다워지니 임금이 자기가 필요해서 초대했다고 믿었습니다.
이 사람도 임금의 순수한 사랑을 자기 변질된 사랑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순수한 사랑 자체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우리 자아에서 나오는 독, 곧 세속-육신-마귀의 욕구 때문에 변질됩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 기준으로 사랑을 정의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 결국은 다 자기 행복을 위한 거야!”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도 다 이기적인 사랑으로 여기고 그래서 자기를 초대하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해줌이 하느님께 이용당해 준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규정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내 기준으로 심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리와 선함, 그리고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기준으로 규정할 때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이 만든 수준의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초대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순수한 사랑이 우리 변질된 사랑을 심판하고 규정할 수 있지, 우리 변질된 사랑이 그분의 순수한 사랑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쉰 포도주만 먹은 사람이 어떻게 값진 포도주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조금씩 덜 쉰 포도주를 마시며 참 포도주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초대에 온전하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무척 가난한 사람이 소금장수를 해서 먹고살았습니다.
그는 벚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녔는데 하도 오랫동안 쓰다 보니 무슨 나무인지 모를 정도로 반들반들 닳았습니다. 
 
하루는 무거운 소금 짐을 짊어지고 지팡이에 의지해 산을 오르다가 중턱에서 휴식도 취할 겸 주먹밥을 먹는데 그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뭔가 살펴보니 무덤 주변에서 하얀 여우가 웬 해골을 닥닥 긁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그걸 뒤집어쓰는 순간 할머니로 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상하게 여긴 소금장수는 지팡이를 들고 몰래 여우 뒤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여우가 큰 마을의 혼인 잔치하는 집으로 들어가자 소금장수도 밥을 빌어먹을 핑계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얼마 뒤 가마를 타고 도착한 신부가 안방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후 안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소금 장수가 안을 들여다보니 할머니가 신부의 배를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작대기로 할머니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말리는데도 소금장수는 계속해서 할머니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잠시후 할머니가 쓰러져 죽으면서 꼬리가 희끗희끗한 여우로 변했습니다.
여우가 죽고 신부가 살아나자 사람들은 소금장수를 칭찬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은 어떻게 저 할머니가 여우인 것을 알았소.”
그러자 소금장수가 대답했습니다. 
“다 몇 대째 내려온 이 지팡이 덕분이지요.”
그러자 동네에서 크게 농사를 짓는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지팡이 내게 파시오. 값은 후하게 쳐 드리겠소.”
 
소금장수는 이것으로 먹고산다며 안 팔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물러서지 않고 큰돈을 쥐여주며 뺏다시피 소금 장수에게 지팡이를 샀습니다. 
 
부자 농부는 지팡이를 써먹을 길을 찾는데 마침 어디서 혼인 잔치를 한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그 집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방에서 신부가 배 아프다고 야단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가 병을 볼 줄 안다면서 들어가 보니 신부 옆에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앉아있었습니다.
농부는 “이놈의 여우 죽어봐라!” 하면서 할머니를 마구 쳤습니다. 
 
잠시 후 할머니가 죽었는데 보니까 여우가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생사람을 잡은 부자 농부는 한순간에 홀랑 망하고 말았습니다. 
                  [출처: ‘옛이야기로부터 배우는 성공법칙’, 유튜브 채널, ‘북올림’]
 
사실 ‘지팡이’가 없었다면 소금장수는 그 산 위까지 오를 수 없었고 해골을 뒤집어쓰는 여우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소금장수가 할머니가 여우인 것을 알게 된 것은 지팡이 때문인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는 소금장수가 사용할 때만 효과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역사와 존재가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부자 농부는 단지 지팡이를 자기 관점에서 규정하여 자신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소금장수까지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용하실 때야만 온전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규정한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 수준 안에서 그것을 휘두르기 때문에
결국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 사랑도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그 초대에 응하지도 않고 응했더라도 그분에게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있습니까?
아이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다 그 근본 에너지는 자신들이 규정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규정할 수 없기에 자기 마음대로 규정하면 된다는 식의 교만이 세상을 망치는 것입니다.
일단 규정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순수한 사랑이나 진리, 선함이라 여기고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워나가는 처지에서 궁금해해야 합니다.
사랑이고 선함이고 진리이신 분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몸에서 빛이라도 나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물고기가 바다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선생님!’이라고 부른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랑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맛보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좋은 포도주를 먹을수록 나쁜 포도주는 맛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사랑하시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 사랑의 전문가가 되는 길입니다.
소금장수와 지팡이가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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