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총량의 법칙: 세상에서 기죽지 않으려면
거룩한 변모 후에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의 믿음만으로는 쫓아내지 못하는 마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이 세상을 야단치시며 마귀에게 호통을 치시자 마귀가 나가고 아이가 나았습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은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나와 있지만, 이번 성경에서 빠진 구절은 “그런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라고
마무리 지으십니다. 믿음을 키우는 것은 ‘기도와 단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것은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야단치신다는 것입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마귀에게 호통은 치시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에 기가 죽는다면 믿음이 약한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는 마치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짓누르듯 ‘두려움’으로 우리를 종살이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들의 위협에 꼼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지렁이처럼 밟아버리십니다.
제가 보좌 신부 할 때도 본인 스스로 마귀 들렸다고 찾아온 자매가 있었습니다.
비를 홀딱 맞고 들어온 그 여인은 길을 지나고 있었는데 자신 안의 마귀가 이 성당에 들어가서 보좌 신부와 이야기 해 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당에 혼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잠실에 사신다고 하셨나요?”
이렇게 제가 물으니 눈빛이 변하고 갈라지는 남자 목소리로 “내가 언제 잠실에 산다고 했어요. 목동에 산다고 했지!”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순간 번개가 치는 것처럼 무서웠습니다.
신학생 때 - 저는 마귀인 것으로 확신하는데 - 제가 혼자 기도하니 그놈이 귀에 대고 거친 숨소리를 냈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이놈이 나를 두렵게 만들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하려는 구나!’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기도를 더 하고 그놈을 무시했더니 그날만 그러고 다시는 그런 소리를 내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기억을 살려서 저도 그 여자에게 “당신은 한 번 들으면 다 기억합니까?”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그쪽 기운이 빠지며 “그건 아니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후부터는 온순해졌습니다.
마귀들이 우리를 짓누르려 하지만 정작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십니다.
내가 마귀나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께서 사신다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어디서 나올까요? 나의 모든 두려움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에서 나옵니다.
두려움도 총량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그 두려움을 하느님을 두려워하는데 다 써버리면 마귀나 세상을 두려워할 어떤 두려움도 남지 않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친구와 둘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곳 조폭이 이쪽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떤 형님을 면회하기 위해 와서 우리 옆에 앉아 술을 마셨습니다.
저는 조폭들이 그렇게 술을 마시는지 몰랐습니다.
보스는 아무 데나 술을 따르고 그러면 아래 조직원은 그것을 받아서 머리를 포장마차 밖으로 내밀고 마시고는 술잔을 놓았습니다.
그 아래 조직원은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하여 어디 그런 일을 할 것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모습을 보며 저는 저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었는데 그 조직원이 기분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밖으로 나와 집으로 갈 때 우리를 불러세웠습니다.
포장마차 안에서는 설설 기던 그 사람이 부르니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도 이 지역의 조폭인 줄 알며 담배를 권했습니다.
저는 담배를 태우지 못했지만, 담배를 태우며 기분이 나빴다면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 조직원은 자신의 모든 두려움을 조직 보스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힘을 믿고 밖으로 나오면
누구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모든 두려움을 봉헌한 이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두렵지 않으니 하느님의 힘을 입을 수 없고 그래서 마귀도, 세상도 두렵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의 모든 두려움을 봉헌하여 이 세상에서는 당당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의 모든 두려움을 봉헌하는 것이 ‘기도와 단식’을 통해 이뤄집니다.
전에 저희 본당에 계셨던 신부님이 미국에서 사목하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귀가 들려 날뛰고 있다고 신자들이 신부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때 약간은 먹고 놀고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신자들이 불러서 가기는 하였는데 그 마귀가
“어이, 신부. 너나 잘 살아. 네가 뭐 하고 사는지 내가 다 말해볼까?”라고 하며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기분이 상하고 기가 죽었지만, 그것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에 그 사람을 가운데 두고 신자들을 빙 둘러앉게 한 다음 묵주기도를 바치게 했습니다.
처음에 비웃던 그 마귀가 1단 할 때는 땀을 흘리고, 2단 할 때는 그만하라고 소리치며, 3단 할 때는 괴로운 소리를 내고, 4단 할 때는 마지막 발악을 하더니, 5단 할 때 소리를 지르고 나갔다고 합니다.
기도와 단식, 이것이 믿음이고 우리가 주님께 모든 두려움을 바친다는 표지입니다.
이렇게 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시고 그러면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내가 기도할 시간을 빼앗기거나 육체의 유혹에 넘어가지나 않을까 하는 것에 둡시다.
나의 두려움을 주는 쪽이 내가 속한 쪽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분에게 속하게 됨을 믿게 되고 그러면 그분을 이길 수 없는 세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저희 형이 저에게 어떻게 사람들 많은 데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비법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단상에 올라가기 전에 이렇게 세 번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내 두려움을 다 소진하면 사람들 앞에서 느낄 두려움이 남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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