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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8-03 조회수 : 2171

평범해 지려는 마음을 참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물 위를 걷는 베드로’입니다.
여기서는 물 위를 걷는 예수님보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가 더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며 자신도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만일까요? 배 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교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다 할 수 있고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삶은 평범함을 거부하는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우리도 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보통 의사들처럼 살았다면 그 큰 믿음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었을까요?
혹은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 평범한 수녀님으로 남기를 원했다면 지금 사랑의 선교회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2센트만 가지고 커다란 병원을 지으려 했습니다. 평범한 성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범함을 거부하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닮아가려 하는 우리 삶도 배 위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평범함을 거부하기 위해 물에 빠져 창피를 당하는 두려움을 무릅쓸 수 있어야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평범함을 넘어서는 일이 ‘병을 고치는 능력’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은 것처럼 나중에는 베드로의 그림자만 스쳐도 병이 낫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병을 고치겠다고 무작정 안수를 주었다가 병이 치유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렵다고 이런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을 느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저는 이것 때문에 성당 내에서도 치유의 미사나 기도회가 많이 열려야 하고 사제들도 할 수 있다고 믿고
기름을 바르고 안수를 해 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려면 치유되지 않아서 받을 수 있는 창피를 이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2차 세계 대전 때의 일입니다.
일본의 해군 장교 ‘가와가미 기이치’는 전쟁이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와 눈 앞에 펼쳐진 현실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군인들을 보면 “저것들 때문에 우리가 패전했다.”라고 손가락질하며 노려보는 사람들 때문에 매일 분노와 좌절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 고통의 시절을 보내다가 급기야 그는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제외한 온몸이 마비되어 마치 식물인간처럼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병원에서 정신과 의사인 ‘호치라’ 씨의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호치라 씨는 기이치 씨에게 물었습니다. 
“기이치 선생, 낫고 싶으세요?”
“예, 낫고 싶죠.”
“그럼 제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어요?”
“네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럼, 저를 한 번 따라 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매일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했던 기이치 장교는 갑자기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니 입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부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 일만 번씩 하셔야 합니다. 감사하려는 마음만이 당신의 마비된 몸을 치료해 줄 수 있습니다.”
 
의사가 돌아간 후, 병석에서 자신 병의 치료를 위해서라도 감사라는 말을 되뇌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병을 고치기 위해 억지로 내뱉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감사의 말이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분노와 적개심이 사라지고 마음도 평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얼굴도 평화로워지고 표현도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를 대하는 가족들도 게이치 씨의 변화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막내아들이 감나무에 홍시가 발갛게 익은 것을 보고 ‘저 홍시를 아버지께 갖다 드려야겠다.’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들은 잘 익은 홍시 두 개를 따서 방문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감 드세요.”
그때 아버지 기이치 씨가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앗, 이럴 수가!”
 
신기하게도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던 손이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아들도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손에서 일어난 이 기적은 그 이후 팔, 다리, 몸 구석구석까지 이어졌습니다.
경직되었던 그의 몸은 마치 마법이 풀리듯 감사의 주문으로 풀리고 있었습니다.
 
기이치 씨가 베드로였다면 호치라 씨는 예수님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호치라 씨는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는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자신이 하는 것은 그도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말을 기이치 씨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렇게 해도 낫지 않으면 그도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군인 장교가 그런 말을 믿다니요.
그러나 믿었고 물 위를 걸었고 드디어 의사처럼 건강해졌습니다. 
 
이렇듯 믿으면 평범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늘의 사람처럼 살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려움도 있겠지만 믿음이 그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들고 하늘 나라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됩니다. 
 
두 발로 걷는 개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본인이 인간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연습을 하여 두 발로 걷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평범함을 넘어서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임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사람이 그럴 수 없다고 비웃는 사람들의 모습과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배에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물 위를 걷는 사람들입니다. 
 
믿는다면 평범함을 거부하십시오.
믿으면 저절로 평범함에서 벗어납니다.
평범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삶을 참지 마십시오.
골을 넣고 항상 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감사를 표하는 메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가 예상하는 대로 움직인다면 더는 제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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