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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8-01 조회수 : 1910

뭘 해야 할지 모를 때 먼저 찾아야 할 유일한 것, 양식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좇아서 오기는 하였지만, 기적의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육체적으로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신기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기적에서 ‘표징’을 본다는 의미는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믿는 것을 넘어서서
그 기적을 보여주는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표징으로 얻는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표징을 보았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빵’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에 대해 물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양식임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가 아버지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고 그리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을 찾고 따르게 됩니다. 
 
요즘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대부분 사람은 행동부터 하라고 합니다. 
이불을 개고 집 정리부터 하면 점점 무엇을 해야 할지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놀면서 배우는 심리학’이란 유튜브 채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이것부터 하세요’에서 어떤 초대손님이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군대 제대하고 자살을 생각하였습니다. 
군대에서 제 꿈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계획하고 전역하고 제 꿈을 이루려고 하다 보니까,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노력은 별로 안 하고 꿈만 꿔 왔던 것입니다. 
1년 정도 도전하다가 포기를 했습니다. 
 
내가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고, 왜 살아야 하나 싶어서 좌절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내일은 뭐 해야 하나, 내일모레는 뭐 해야 하나, 이렇게 살다 보니까 죽는 게 편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이때 생각나던 게 가족이었습니다. 
나는 그냥 죽으면 그만인데 남은 어머니 아버지 동생은 절망적일 거 아니에요.
저 하나 때문에. 그러면서 자살 생각은 접고 어떻게 살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후 6개월 동안 술만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며 내 생각을 노트에 적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뭘 해야 좋을지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돈 벌고 싶다.’라는 결과물만 나왔습니다. 
 
그러며 든 생각은 ‘나를 먼저 알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는 (무엇)이다.’라는 것을 20개 정도 다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알게 되니까 행동에 옮길 일이 생각나더라고요. 아버지 출근하면 술 마시고, 집에 계실 때는 잠만 잤는데 시간을 정해놓고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니까 당장 해야 할 일이 떠오르더라고요.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이분의 말을 정리하자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니 먼저 자신을 잘 알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려면 양식부터 찾아야 합니다. 
양식은 부모가 주는 것입니다.
양식을 찾으면 부모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게을러지지도 못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양식은 그냥 음식이 아닙니다. 
사랑이 담긴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긴 음식 안에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뜻이 들어있습니다. 
 
루마니아의 ‘요람’이란 국가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온전히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걷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발육도 저하된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먹는 음식에서 표징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음식에서 표징을 발견한다는 말은 음식과 섞여 있는 그것을 주는 이의 ‘사랑’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발견했다면 그 사랑 안에는 반드시 그것을 주는 이의 ‘뜻’이 들어있기 마련입니다. 
 
일반 가정에서 아이들이 받아먹는 음식에는 부모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 음식에서 표징을 본다는 말은 그 양식을 주는 이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그 뜻이 그 아이를 성장하게 만듭니다. 
 
모든 양식에는 그것을 주는 이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요람’이라는 보육원에서 자라는 이들은 그 ‘뜻’을 물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며 자랐기에 걸어야 할 때 걷지 못하고 말을 해야 할 때 옹알이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 양식을 먹으며 ‘오늘은 어떤 뜻을 따라야 하는가?’라는 것을
스스로 질문하고 옹알이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됩니다. 양식이 부모님의 사랑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믿게 된다면 우리는 매일 아버지의 뜻을 묻고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는 주인에게 양식을 먹는 한 뭐 해야 하며 살아야 할지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밥을 주는 주인의 뜻을 따라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양식을 먹는 것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먹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을 잃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몇 년을 같은 자리를 지키는 개들도 있습니다. 양식이 그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부모가 주는 음식은 더는 양식이 되지 못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대로 성장해 버렸고 놀면서 밥을 먹는 자녀에게 음식을 주며 사랑이 담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줄어들면 정체성도, 뜻도 희미해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으며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대로 살면 됩니다. 
양식이 부모가 주는 것임을 믿게 된다면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내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두 개만 아침에 해치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독서가 될 수도 있고 운동이 될 수도 있고 기도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양식을 통해 아버지를 찾은 사람들이 자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내일 일어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을 수 있을 때 그것을 죽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생기는 뜻은 없습니다.
내 안에서 뭘 해야 하는지, 그 뜻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옵니다.
내 안에 있는 뜻은 그저 내가 생존하면 된다는 욕구와 그동안 타인들에 의해 주입되어온 것들뿐입니다. 
 
인간답게 만드는 모든 욕구는 ‘양식’으로 들어옵니다. 사랑이 담긴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인이 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양식은 부모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큰 사랑을 지닌 양식을 찾아야만 합니다.
양식을 먹으며 그것을 주는 이 때문에 사는 게 인간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사랑이 담긴 양식, 그것이 성체입니다. 
성체를 먹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성체를 영하는 이들은 하루 무엇을 하며 지내야 할지 타인에게 묻지 않습니다. 
잠들기 전에 하느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뜻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2~3개를 정하고 그것을 성취하며 살아갑니다. 
 
양식을 먹는 사람은 아침에 ‘개구리 두 마리’(오늘 실천해야 할 주님 뜻)를 삼킬 힘이 있습니다.
내일 하느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명확하게 해야 할 일이 나오지 않는다면 성체를 양식으로 영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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