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심리학자 브레이저 박사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주로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말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한테 1억만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아이도 남들처럼 공부를 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잘 사는 사람과 결혼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미남(미녀)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은 주로 ‘~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정형 질문에 매달려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부닥친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브레이저 박사는 ‘나는 ~라서(~가 아니라서) 다행이야.’라는 문장을 매일 4개씩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오늘도 먹을 수 있고, 잠잘 곳이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다행이야.”
결국 살아 있음 자체가 다행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말은 어떤 형식으로 하고 있습니까?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헤로데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세례자 요한과 같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놀라운 기적까지 행한다지요. 따라서 헤로데는 바로 이 사람, 예수라는 사람은 분명히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데도 왜 이런 생각에서 벗어내지 못했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벌만 생각하고 있기에 그는 편안함이 아닌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상황을 바꿀 수만 얼마나 좋을까를 계속 소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복수하는 분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분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이제부터 죄를 짓지 않으면 사랑 실천에 힘쓸 수 있다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에 힘들어할 뿐입니다.
어떤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정형 질문에서 벗어나, ‘나는 ~라서(~가 아니라서) 다행이야.’라는 문장으로 지금의 순간을 행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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