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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7-27 조회수 : 2304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가라지에서 밀이 되는 이유
 
오늘은 예수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밀과 가라지는 잘 구별이 되지 않아서 다 자라고 나서 마지막 때에야 심판이 내려집니다. 
 
지금은 두 자매가 똑같이 맷돌질한다고 하더라도, 두 형제가 똑같이 밭을 간다고 하더라도 둘 중의 하나는 밀이고 둘 중의 하나는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성당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어도 한 사람은 밀이고 한 사람은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겉모양으로는 구분이 안 되는 게 밀과 가라지입니다. 
 
내가 밀인지, 내가 가라지인지 개인적으로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시간에 따른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작년에 밀이었으면 올해도 밀이고, 작년에 가라지였으면 올해도 가라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작은 밀이었다면 올해는 더 밀이 될 것이고, 작년에 덜 가라지 같았다면 올해는 더 가라지 같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더 그리스도답게, 그렇지 않은 가라지는 예수님의 모습과 더 상반되게 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를 말씀하시는데,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곧 가라지는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입니다. 물론 밀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를 비교해 볼 때, 올해 덜 죄를 짓는 사람은 밀이고 더 죄를 짓는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렇다면 가라지에서 밀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성령의 씨앗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믿음을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만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아무리 많은 죄를 짓고 있어도 가라지에서 밀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변해가는데 자신이 가라지처럼 변하는지, 밀처럼 변하는지 그 기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기준은 하느님을 똑같이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15년 미국 마이애미의 한 재판장. 
판사 ‘민디 글레이저’는 범죄자 ‘아서 부스’를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0세였던 그는 절도 및 도주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인을 보고 판사는 느닷없이 웃음을 지었습니다.
피고인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한 판사는 재판과 상관없는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혹시 노틸러스 중학교에 다니셨나요?”
 
그러자 피고인은 “오, 세상에!”를 연발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합니다.
피고인도 판사가 중학교 때 친구였던 것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노틸러스 중학교는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명문 학교입니다.
둘은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던 것입니다.
절친했던 둘은 모두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언어 과목에 강점을 보였던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기를 꿈꿨고 수학과 과학을 잘했던 아서 부스는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17살이 되어 아서 부스는 도박과 마약에 빠졌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였고 급기야 남의 돈에 손을 대며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아서 부스가 징역형을 선고받은 해에 민디 글레이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입학하였습니다.
 
10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32세에 취직준비를 시작한 아서 부스는 범죄자를 받아 주는 직장은 찾을 수 없었고 다시 마약에 중독되어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었고 아서는 얼마 안 가 또다시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같은 중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출발한 둘은 판사와 피고인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민디 글레이저는 말합니다. 
“항상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습니다.
중학교 때 정말 좋은 아이였습니다.
친구들이랑 같이 축구도 자주 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거기서 뵙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아서 부스씨, 앞으로 당신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슬픈 건 우리가 벌써 이만큼 늙었다는 거죠. 진심으로 행운을 빌게요.”
 
이후 아서는 보석금 4,800만원의 판결을 받고 10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민디 글레이저 판사는 직접 마중을 나와 친구의 새 출발을 응원해줬습니다. 
 
아서 부스는 말합니다. 
“판사가 된 친구와의 만남은 제게 큰 충격을 가져다줬어요.
앞으로는 성실히 약물치료도 받고 똑바로 살아가겠습니다.
이제는 자포자기가 아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 볼게요.”
 
재판을 받을 때 아서 부스는 거의 오열하다시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였을까요? ‘비교할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음을 자신의 비교 대상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교해야 할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나의 삶을 비교하려면 나도 그리스도와 같은 형제임을 믿어야 합니다. 
 
민디 글레이저 판사와 아서 부스가 같은 학교에서 같은 우등생이 아니었다면 아서 부스가 그렇게 살아온 세월을 보며 오열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함께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면 그분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내가 같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출발점이 다르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밀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가라지가 밀이 될까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비교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더는 그분의 모범과 멀어질 수가 없기에 가라지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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