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저는 승리 욕구가 너무 컸습니다. 지는 것이 싫었고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이기려고 했습니다. 아마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마음은 신부가 되어서도 이어졌습니다. 2001년부터 인터넷에 묵상 글을 올리면서, 한동안 제 글에 대한 댓글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면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지요. 묵상 글이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쓸데없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욕망의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새벽에 묵상 글을 올린 뒤에 전혀 확인하지 않으면서부터였습니다. 제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에 다시 보지 않습니다. 고칠 내용이 있을 때도 있겠지만, 구독자들이 알아서 고쳐 보시겠지 라는 마음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순수한 마음으로 묵상 글을 쓸 수 있었고, 이렇게 20년 넘게 묵상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SNS의 라이브 방송 중 위험하게도 25층 높이의 아파트 난간에서 춤추다 추락사를 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방송 촬영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닌 주님께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산다면 어떨까요? 굳이 나를 드러낼 필요도 없고, 그저 사랑 자체에만 집중하면서 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은 씨라 할 수 있는 겨자씨가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또 누룩이 밀가루에 들어가서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하늘 나라는 우리의 작은 마음에서 시작해서 성장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마음은 세상의 마음이 아닙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채우는 욕망의 포로가 되는 마음이 아닙니다. 대신 주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경쟁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아닌, 모두를 포용하고 함께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에서 시작해서 하늘 나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주님의 시선을 끌 수 있습니다. 이웃을 향한 자그마한 배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행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 지금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바치는 나의 기도 등등…. 우리의 작은 마음이며 작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눈여겨보며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작은 마음을 통해서 커다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지금을 충실히 사는 용기
정호승 시인의 ‘새벽편지’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갑곶성지에서 봉안당을 운영하다 보니 죽음을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안치 예식을 하면서 유가족들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봅니다. 이 슬픔과 안타까움은 시간이 흘러도 극복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로움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는 외로움에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때 시인의 말처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즉,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만남을 희망하며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