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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7-26 조회수 : 2368

인간은 비유로 소통해야 하는 삼위일체 구조로 되어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겨자씨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나무처럼 자라나 휴식 같은 친구가 되게 합니다.
또 성령은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진 누룩과 같아서 그 사람을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어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빵이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라고 하신 시편 구절을 인용합니다.
직역하면 “나는 비유로 내 입을 열리라.”입니다.
정말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본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느님은 왜 비유로만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먼저 하느님 삼위일체의 신비스러운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성자’, 그 계시를 완성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하느님 모습을 따라, 영-혼-육으로 되어있는데, 보이지 않는 ‘생각’(혼),
그 생각을 표현하는 ‘말’(육), 그리고 그 말이 생각과 일치하게 만드는 ‘마음’(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나 나무와 소통한다면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언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온전한 소통을 위해서는 같은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생각’과 같은 ‘아버지’, ‘말’과 같은 ‘성자’, ‘마음’과 같은 ‘성령’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긴 말은 생각과 일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은 생각과 다릅니다.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담긴 표현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할머니가 신부님 쓰시라고 돈 만 원을 비닐봉지에 싸서 몸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고 몰래 손에 쥐여 준다면 그것은 단순히 돈 만 원을 주시는 행위일까요? 돈 만 원 안에는 할머니가 사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에게 주는 선물이나, 행위, 혹은 말에 마음이 담겨야 비로소 완전한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담긴 선물은 분명 보이지 않는 생각을 계시하는 비유가 됩니다. 하지만 개에게 그렇게 준다면 그 비유는 무너져 아무 쓸모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 안에 마음이 담겨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어서 당신 생각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당신을 닮은 구조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님이 “요즘 성인들이 저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느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 자매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들어서는 좀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친구와 새벽 5시까지 통화하다 잠든 날이 있었거든요.
그날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축일이었습니다.
그 전날 딸에게 ‘내일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축일이니 천둥이 칠 수 있으니까 잘 들어봐!’라고 했었어요.
그냥 그분들이 이야기할 때 스콜라스티카 성녀가 오빠를 보내기 싫어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며 비가 내려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정말 아침에 딸이 저를 흔들어 깨우면서 ‘엄마 정말 천둥이 치고 비가 왔어!’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참 신기하다 여겼죠.
그런데 손목을 보니 제가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그림이 있는 묵주 팔지를 차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 팔지를 차지는 않거든요.
전 세례명이 마리아인데요.
그래서 친구에게 신기해서 전화했죠.
신기하게도 내가 성녀의 팔지를 차고 있는데 정말 그분들이 표징을 보여주셨다고요.
 
근데 그 친구가 더 놀라는 거예요. 그 친구는 베데딕도 팔찌를 차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그쵸?
요즘 성인들 축일을 미리 기억하고 기도하였는데, 정말 그분들이 함께 계심을 느꼈다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정말 성인들이 그 자매님과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처음에 말만 들었을 때는 머리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기니 그것이 비유가 되는 것이고
그 비유 말씀을 들으면 머리만 건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건들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 인격적인 소통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지 않으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인격적 소통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과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힘내, 파이팅!”한다고 해서 힘이 날까요?
머리로만 전달하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건들려면 내 마음을 그 생각과 합하여 비유로 전달해야 합니다. 
 
“게도 탈피하는데 그때는 죽은 것처럼 보여. 하지만 더 강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잖아.
우리도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거 같아. 조금만 더 힘내자!”
 
이렇게 말해준다면 그 사람은 힘든 상황에서 ‘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구나. 그래 힘내자!’ 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제가 굳이 복음 묵상을 할 때 억지로라도 비유를 끼워 넣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비유를 찾으면서 저의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따지자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온전한 계시가 되지 못하십니다. 
 
만약 우리도 하느님 삼위일체 모습대로 살아간다면 모든 행동과 말에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하나의 비유가 됨을 잊지 맙시다.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보이지 않는 계시 대상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자라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혼과 육이 하나가 된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 나라의 계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비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 그 사람은 완전한 소통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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