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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2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7-23 조회수 : 2074

자기를 사랑하면 깨달음이 오지 않는 이유: 깨달음은 나를 태우는 불이기에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 비유의 해설입니다. 
씨는 말씀이고 밭은 우리 마음입니다. 
말씀이 아무리 떨어져도 길과 같은 교만, 돌밭과 같은 육욕, 가시밭과 같은 소유욕이 있다면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말씀이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말씀이 삶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변화’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내가 옳다고 믿고 사는 삶을 포기하고 그것과 반대되는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제가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을 때 그런 행동이 행복하다 믿었습니다. 이것이 아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을 고집하면 깨달음이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 틀릴 수 있다고 마음을 열 때 깨달음이 옵니다.
인터넷 게임이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를 준다고 깨달았을 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요?
게임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안다고 하던 나 자신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고집스럽게 만들지만 깨달음은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렇다면 세속-육신-마귀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들은 ‘자아’에서 솟아나는데 결국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깨닫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쫓는 것이 행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깨달음은 자아로부터 탈출하게 만들기에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안다는 것을 언제든 포기할 줄 알 때 깨달음이 옵니다. 
 
축음기, 영사기, 전구 등 무려 1천3백여 건이 넘는 발명품을 내놓은 에디슨(1847~1931)도 생애의 말년에는 특유의 외고집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자신만 믿게 된 것입니다. 
많이 아는 사람은 고집스러워집니다.
자아는 자신이 많이 안다고 믿게 만듦으로써 깨달음이 들어오는 것을 막습니다. 
 
그는 “몸은 머리를 여기저기 옮겨주는 데만 필요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70세가 넘어서도 잠자는 시간이 하루 4시간에서 5시간으로 늘었을 뿐 여전히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축음기 회사에 과도한 애착을 느낀 나머지 라디오방송이나 전기식 레코드플레이어의 시장성을 무시한 것이 그의 실책이었습니다.
에디슨은 “사람들은 라디오국이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에 곧 싫증 내고 우리 회사의 축음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세 아들이 아버지를 설득하다 끝내 고집을 꺾지 않자 몰래 전기식 레코드플레이어 제조에 나셨다가
에디슨의 격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70대 후반이 돼서야 에디슨은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축음기 생산을 그만두고 라디오 제조에 나셨으나
2년 후 2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공장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80세가 되자 에디슨은 이번에는 고무 제조에 호기심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내에 자생하는 식물들에서 고무 성분을 추출하는 일이었습니다.
에디슨의 부인은 회고하기를 “그는 고무 생각만 하고 고무 이야기만 하고 고무 꿈을 꾸었다.”라고 했으며
“미국은 5년 이내에 최고 고무 생산국이 된다.”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고무는 천연고무보다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무엇보다도 질이 형편없었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 없이 노년을 보내던 에디슨은 결국 1931년 10월 18일 향년 84세로 눈을 감았습니다.
 
역사상 가장 똑똑하다고 평가받는 아인슈타인도 말년에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는 자신을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깨달음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에디슨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발명품을 통해 그는 교만해졌습니다.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여겨 결국 말년은 고집만 부리다 갔습니다. 
 
우리는 나는 틀렸고 오직 주님만 진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끊임없이 죽으려 해야 끊임없는 깨달음이 옵니다.
깨달음을 통한 삶의 변화는 언제나 자아의 죽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자아를 죽이는 만큼만 들어옵니다.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하는데 가난한 농부는 보리쌀 한 가마니를 지고, 부자는 금화 한 자루를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부자는 농부를 보고 “이 급한 피난길에 왜 몇 푼어치 되지도 않는 그 무거운 보리쌀 가마니를 지고 가느냐?”
고 비웃었습니다. 
 
피난길 동안 농부는 가지고 간 보리쌀로 조금씩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금화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피난길이니 음식을 사 먹을 만한 곳도 없었습니다.
 
하루를 굶주린 부자는 농부에게 말했습니다. 
“금화 한 닢 줄 테니 보리쌀 가마니를 내게 파시오.”  
보리쌀 다섯 가마니 값은 되는 금화였습니다. 부자는 선심이라도 쓰듯 제안했지만, 농부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벌컥 화를 냈습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다섯 배나 되는 값을 치르겠다는데도 싫단 말이오?” 
이틀이 지나자 부자는 배가 고파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금화 두 닢을 줄 테니 보리쌀 반 가마니라도 파시오.”
이번에도 농부는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아니,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욕심이 너무 과하지 않소. 도대체 얼마나 더 받겠다는 거요?” 
 
또 하루가 지났습니다.
부자는 도저히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가진 금화 절반을 줄 테니 보리쌀 한 말만 파시오.”  
하지만 농부는 역시 말이 없었고 부자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부자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을 만큼 쇠약해졌습니다.
굶주림으로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 지경이 되니 신주 모시듯 했던 금화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부자는 길에서 쓰러지며 농부에게 간절히 하소연했습니다. 
“여보시오,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소. 죽기 전에 물이라도 배불리 먹고 죽게 저기 물 한 사발 떠다 줄 수 있겠소?” 
그제야 농부는 밥을 지어 굶주린 부자에게 먹였습니다. 
                           
 [출처: 『깨달음: 내 눈 뜨기』, 법륜스님, 정토 출판]
 
나 자신이 추구하는 세속-육신-마귀가 아무 쓸모 없고 오히려 나를 죽이고 있음을 먼저 깨닫지 못하면 더는 아무런 깨달음도 얻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결국 나 자신을 죽이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초에 불을 붙여주려는데 자기 초가 타들어 가는 것이 아까워 초를 등 뒤로 숨기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은 빛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를 태웁니다.
내가 태워지기를 원치 않으면 깨달음은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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