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7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마태오 12,14-21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라고 해 라는 말이 희망이 될 수 없듯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희망’의 상징으로 나오십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와 연결해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시는 ‘함구령’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조용하면서도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자비로운 분으로 표현됩니다.
함구령은 아무래도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큰 사람으로 인식되어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분이 되지 않으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함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18세기 빈부격차가 심했던 프랑스 사회에서는 빵을 구할 수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라고 해 평민들이 분노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월세가 힘들면 전세를 살면 되고 전세가 힘들면 집을 사면 되지 않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누구에게 희망을 주려거든 같은 처지가 되거나 더 낮은 처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희망을 품게 되지만 태생부터 자신들과 다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무슨 위로의 말을 하더라도 그건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성자께서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신 이유가 이것일 것입니다.
제 유튜브 채널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너무 현실의 사람들과 별개의 삶을 살기 때문에 그들이 더는 신자들의 희망이 될 수 없고 그들이 하는 말에 공감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2020년 한국외방선교수녀회 신임 총장이 된 이인선 수녀님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은 정의를 외면한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 양들이 사지(死地)로 내몰리고 있는 처절한 상황 앞에서도 눈 귀 입을 닫은 목자들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직장 상사에게 굴욕을 당해 본 적도 없고, 자기 방 청소며, 자신의 옷 빨래며, 자신이 먹을 밥 한번 끓여 먹으려고 물에 손 한 번 담가 본적이라곤 없는 가톨릭의 추기경, 주교,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결하고 영성적인 말씀들이 가슴에 와닿을 리가 없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 보호를 외면하고, 제도교회의 사리사욕에만 몰두하는 목자 아닌 관리자들이 득실거린다. 고급승용차, 고급음식, 골프, 성지순례(해외여행)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부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 자신이 부자이며 특권층이 되어버린 그토록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주교문장에 쓰인 멋스러운 모토와 그들의 화려한 복장, 가슴 위의 빛나는 십자가를 수난과 처참한 죽음의
예수님의 십자가와 도무지 연결시킬 재간이 없다.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 걱정이며 지나치게 기름진 그들의 미소와 생존의 싸움에 지쳐있는 사람들과는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또한,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들 역시 그리 가난하지가 않다. 수도원에서는 아무도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다.
안정된 공간에서 해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대접을 받고 산다.
어딜 가도 수녀님, 수녀님 하면서 콩나물값이라도 깎아주려는 고마운 분들 속에서 고마운 줄 모르고 덥석덥석 받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 간다.
말만 복음을 쏟아 놓았지 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며, 아기를 낳아보고, 남편 자식 때문에 속 썩고, 시댁 친정 식구들에게 시달리며
인내와 희생을 해본 적이라곤 없는 탓에 철딱서니 없는 과년한 유아들이 없지 않다.
수도복 입었다고 행세할 무엇이 있었던가? 본인이 원해서 하는 독신생활에 자랑할 무엇이 있었던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겸손하게 봉사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는다면 수도복과 수도 생활, 독신생활조차 그 의미가 희석된다.
교구, 본당, 수도회의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세상일에 눈을 돌릴 수 없다고 변명하고 책임 회피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이 함부로 훼손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실의와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정치사회의 불의를 향해
단호하게 저항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수도자들이라도 결집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수도자들이라도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종교계가 소름 끼치도록 조용하다. 이것은 무얼 뜻하는 걸까?
나 역시 작은 수녀에 불과하고 비겁하며 합리화하고 회피하고도 싶다.
내가 비판한 사람들 못지않게 비판받을 행동을 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의식으로 인해 차라리 그 모든 것에서 물러나서 침묵을 택하고도 싶다.
그러나,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이
내 심장에서 불꽃처럼 뜨겁게 일어서고 있다.”
정말 가난하게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시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인선 수녀님의 글은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처럼 살지 못하는 저 자신으로서는 이분이 비판하는 모습이 저일 수밖에 없어서
또한 머리가 숙여지고 반성이 됩니다.
제가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당연히 지금 모습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말레이시아도 코로나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부에 기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으면 집에 흰 깃발을 내거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위에서 먹을 것이 남은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운동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자신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인선 수녀님의 글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지만 그래도 제가 흰 깃발을 내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희망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조금씩이라도 더 가난해지고 더 낮아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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