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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7-13 조회수 : 2502

기적이 주는 회개란? 아빠가 걷는 것도 아기에겐 기적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질책하십니다. 
유황불에 멸망한 소돔도 그 많은 기적을 보았다면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기적’과 ‘회개’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기적은 이 세상에서 보면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본 뉴스인데 강풍에 나무가 쓰러져 아기가 자는 방 위를 덮친 것입니다.
CCTV에 찍힌 아기의 모습은 나무가 창문 위로 쓰러지며 유리창이 깨져 자신 위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아기는 눈만 크게 뜨고 있을 뿐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어른이었다면 그 순간 빨리 피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기는 어른들이 하는 행위 자체가 기적입니다. 
 
다른 비디오도 있는데 아이가 혼자 놀다가 주방의 에어프라이어에 불이 난 것을 발견합니다.
아이는 자기 머리를 잠시 두드린 다음 빨리 다른 방에 있는 아빠에게 달려갑니다.
아빠가 달려와 아기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큰불이 날 수 있는 상황을 수습하였습니다.
아기는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기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이유는 이런 어린이들처럼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우선 이 세상을 뛰어넘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빠와 아기가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분명 사는 세상은 다릅니다.
아빠는 바깥세상에서 생활하며 돈을 법니다.
아기는 아빠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다면 자신도 그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빠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며 지금의 세상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계속 기어 다니려고만 하고 말도 안 하려 한다면 아빠의 기적을 보고 아기가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이런 회개를 이끄는 용도입니다. 
 
일본의 한 초등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뜀틀 시간에 반별로 대표가 한 명씩 나와 가장 높이 뛰는 학생을 가립니다.
한 소년이 압도적인 실력을 뽐냈고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최고 높이의 10단 뜀틀에 도전했습니다.
소년은 전력을 다해 뛰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뜀틀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두 번, 세 번 더 뛰었지만 아이는 실패했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때 어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괜찮아, 지금도 충분해. 넌 최선을 다했어. 이게 한계야!’
 
그러나 그때 같은 반 아이들이 뛰어나와 그 아이를 빙 둘러싸고 할 수 있다고 함께 응원해줍니다.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은 아이는 다시 도전했고 거짓말처럼 멋지게 뜀틀을 뛰어넘었습니다. 
 
[출처: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이것을 생각하세요’, 유튜브 채널 ‘체인지 그라운드’]
 
회개란 기적과 같은 일을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이미 기적을 하는 분을 믿는 데서 나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기가 부모 없이 걸을 수 있었을까요?
아기가 부모 없이 말할 수 있었을까요?
아기가 부모 없이 사랑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었을까요?
절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떤 누구도 인간다울 수 없었습니다.
본성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 의해 태어나야 생깁니다. 
 
참다운 회개란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고 분명 이 세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직감하고 그 기적을 일으키는 분을 부모로 삼아 ‘나도 그분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분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도 그분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그다음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힘이고 그 노력을 시작하는 첫 순간이 회개의 순간입니다. 
 
1950년대 중반 하와이 카우아이 섬에서 행해진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실행하였습니다. 
1950년대까지 카우아이 섬 주민들은 대대로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주민 대다수가 범죄자나 알코올 중독자 혹은 정신질환자였습니다.
연구자들은 1955년에 이 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가정환경과 사회 환경이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추적 조사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그 후 20여 년간에 걸쳐 추적 조사한 연구 성과들이 책으로 출간되었지만, 그 결과는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 가족 구성원들이 가정불화, 이혼, 알코올 중독, 정신질환 등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학습 부진에 시달렸으며, 약물중독에 빠지거나 정신질환을 앓았고, 범죄에 빠지거나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습니다.
18세가 되었을 때는 많은 아이가 전과자나 미혼모가 됐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녀들 또한 온전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구에 참여한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예외적인 사례들을 발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전체 연구대상자 중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였던 201명의 성장 과정에 대한 자료를 다시 분석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 대부분이 문제아로 성장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72명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강한 자신감과 긍정성을 지닌 훌륭한 젊은이로 성장한 예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오래 고심한 끝에 그들에게는 삶의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공통된 속성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에미 워너는 이것을 ‘회복탄력성’이라 불렀는데, 잊혀갈 뻔했던 연구에서 그녀는 전혀 의도치 않았던 엄청난 발견이었습니다.
 
이렇게 에미 워너 교수가 40년에 걸친 연구 성과들을 정리하면서 터득한 회복탄력성의 핵심적인 요인은
결국 ‘인간관계’였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성장한 아이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처지를 조건 없이 이해하고 받아준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할머니가 될 수가 있어도 누군가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조: 『회복탄력성』, 김주환, 위즈덤하우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 기적은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누군가가 너도 할 수 있다며 믿어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 나라에 사는 것이 불가능함을 아시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러 오셨습니다. 
 
아빠가 걷는 모습을 보며 아기가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듯,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할 수 있다고 믿어야 그분이 속한 세상에 살 자격을 얻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라 믿고 그리스도가 하신 것은 다 할 수 있다고 믿읍시다.
이것이 오늘 비난을 받아 저주를 받게 될 고을들을 닮지 않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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