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닌 말씀의 칼날을 날카롭게 유지 하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왜일까요? 혼자 다니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충실할 수 있을 텐데 둘이 다니면 계속 상대를 신경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근본이 먼저 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사랑실천에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본당 신부와 보좌 신부, 본당 신부와 수녀님들, 혹은 수녀님들 간에 화목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그분들이 어떤 복음을 신자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요?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이들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어 화목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 내용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주님이 계심을 믿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것이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빵과 돈과 여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먹고 자고 입을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충분히 있어야 신경을 쓰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가질수록 더 신경 쓰게 되어있습니다. 그냥 주님의 섭리에 맡기면 됩니다.
저도 돈이 필요할 때면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돈을 줄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욕심이 생기면 사람의 영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을 챙길 도구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지나치게 막 대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시어머니는 자신처럼 부잣집에 자기 아들처럼 대단한 사람에게 며느리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서입니다.
이렇게 돈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공동체에 있다면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갈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오는 사람도 그러한 시선으로 보기에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이가 이런 시어머니와 같이 되면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중국 고대 전국시대 문혜왕(文惠王)을 위하여 당시 최고의 백정인 포정(庖丁)이란 사람이 소를 잡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대는 곳이나 발로 밟는 곳이나 무릎으로 누르는 곳은 푸덕푸덕 살과 뼈가 떨어졌습니다.
칼이 지나갈 때마다 설겅설겅 소리가 나는데 모두가 음률에 들어맞았습니다.
그의 동작은 상림(桑林:탕 임금이 만든 춤)의 춤과 같았으며,
그 절도는 경수(經首:요임금이 만든 음악)의 절주(節奏:가락이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에 들어맞았습니다.
문혜왕이 보고 말하였습니다.
“아아, 훌륭하도다. 재주가 이런 지경에 이를 수가 있을까?”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았을 적에는 보이는 것 모두가 소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완전한 소가 보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춰 버리고 정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천연(天然:사람이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의 조리를 따라서 큰 틈을 쪼개고 큰 구멍을 따라 칼을 찌릅니다.
소의 본래 구조에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부닥뜨리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에야 부딪치겠습니까?
훌륭한 백정은 일 년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이 되었으며, 그사이 잡은 소는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내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휑하니 칼날을 움직이는데 언제나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나도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내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뼈와 살이 엉긴 곳을 만날 때마다 저도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조심조심 경계하면서 눈은 그곳을 주목하고 동작을 늦추며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 뼈와 살이 후드득 떨어져 흙이 땅 위에 쏟아지듯 쌓입니다.
그러면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기분에 잠깁니다.
그러고는 칼을 닦아 잘 지킵니다.”
문혜왕이 말하였습니다.
“훌륭하도다. 나는 백정의 말을 듣고서 삶을 기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 이야기는 『장자』의 '양생주(養生主)'편에 나오는데 포정이 소를 잡는다는 뜻으로 ‘포정해우’(庖丁解牛)라 합니다.
장자가 말하는 ‘도’(道)’란 우리가 말하는 ‘진리’와 같습니다.
진리를 터득한 포정은 다른 백정들과는 달리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정신으로 봅니다.
진리를 터득한 사람은 소를 돈으로 보지 않고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분해한다는 뜻입니다.
무아의 경지에서만 소의 본질을 보고 그것을 분해하는 데에서 춤추듯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도 병자가 잘 낫지 않고 악령을 쫓아내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 진리의 칼이 무뎌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내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의 관계가 좋은지 살펴야 합니다.
좋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서로 사랑한다면, 그다음은 ‘가난’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 것을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시선이 소에게 빼앗겨 힘줄을 건드리고 뼈를 건드려 칼날이 무뎌집니다.
우리도 포정이 소를 육신의 눈이 아닌 정신으로 대하되 이치에 따라 조금도 억지가 없이 춤추듯 칼을 놀리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 대해 스스로 욕구를 버리고 대상에 대한 의식이 없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행동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욕구에 사로잡히면 자연의 이치를 보는 눈을 잃어 성령의 칼날도 무뎌지고 그러면 복음을 전할 힘을 잃습니다.
백정이 무딘 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씀의 칼날이 무뎌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사랑의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 자신부터 세속의 욕망을 없애 공동체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무언가 세속적인 것을 바라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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