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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7일 -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7-07 조회수 : 2250

냉담률이 높으면 선교도 힘들어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십니다.
이때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하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한 이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다른 민족이나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지 말라고 하시고 우선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어쩌면 아직 그들의 능력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이미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길 잃은 양에게 하늘 나라를 실현하게 하라는 말씀은 우선 ‘내실’을 먼저 기하라는 의미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요즘 코로나가 회복되어도 기존의 50% 신자만 다시 성당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국 평균으로 하면 신자의 10% 수준만 주일미사에 참례한다는 뜻입니다.
세례받은 10명 중의 9명은 길잃은 양들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2021.06.08 방송)에서 방영된 내용입니다.
아파트 9층 베란다에 사납기로 소문난 황조롱이가 날아들었습니다.
주인장의 눈을 오랫동안 응시하던 천연기념물 황조롱이는 다음 날 알 하나를 베란다에 낳고 갔습니다.
그다음 날도 하나, 그다음 날도 하나. 이렇게 6마리의 새끼들이 태어났습니다.
엄마 황조롱이는 아빠 황조롱이가 물어오는 음식을 잘 다듬어 새끼들에게 먹였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른 어느 날 새끼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이소’를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소란 새가 자기 둥지를 떠나는 첫 비행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없어진 한마리가 이소에 성공하지 못하고
다른 새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바닥까지 떨어진 첫째는 고양이와 다른 동물등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만, 아파트 주인의 발 빠른 대처로 전문가를 불러 다시 베란다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첫째 황조롱이는 바로 다시 비행을 시도했고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가 하는 것을 보고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이소에 성공합니다.
마지막 남은 막내는 좀 약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있던 어미 황조롱이가 무서워하는 막내를 위해 먹이로 유인해서 조금씩 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러자 황조롱이의 새끼들이 모두 다 잘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새끼 새의 주위에서 항상 새끼 새를 지켜보며 스스로의 힘으로 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줬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끼 새가 아파트 베란다에 있으면 언제나 안전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새끼들이 하늘 높이 비상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보호해주고 응원해주었습니다.
이는 새끼 새를 안전하게 맡아줄 아파트 주인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 본성을 완성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처럼 사랑으로 또 누군가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선교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으로 만들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선교하려면 자녀를 낳아 안전하게 맡길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그런 사도들을 배출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한다고 해도 10명 중의 9명을 잃어버리는 상태라면
선교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선교할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요?  
 
영화 ‘가버나움’(2018)에서 집을 뛰쳐나온 자인은 결국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법정에 고소합니다.
키울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을 낳아놓고 형제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부모가 원망스러웠던 것입니다.
부모는 능력을 다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인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를 고소하는 자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냉담률을 줄이지 않고 선교만 강조한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당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더니 고해성사도 무섭고 미사 드리는 것도 재미가 없는데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 하나 없다면 그런 식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어쩌면 자신에게 선교한 교회를 고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냉담률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 이전에 ‘기를 살려주시는 목자’로 나오십니다.
그리고 그런 목자들을 많이 보내 달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미사 때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기뻐하며 기가 살아야 하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공동체가 있기에 세상에서도
당당히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냉담률이 높은 것입니다.  
 
먼저 전례 개혁이나 소공동체 개혁을 통해 기가 사는, 행복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길 잃은 양들이 돌아올 것이고 그들이 또 새로운 이들을 선교할 것입니다. 
 
냉담률이 높다는 말은 교회가 매력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먼저 매력 있는 교회가 되어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선교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 사도들과 그 곁에 모이고 싶어서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싶어 했던 그런 교회의 모습을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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