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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4일 -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6-24 조회수 : 2630

자녀가 사춘기 겪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태어나고 할례를 받을 때 받은 이름입니다.
보통은 가족의 전통적인 이름을 따르지만, 완전히 새로운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지금으로 말하면 세례입니다. 
따라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그 집안의 전통을 따름이 아닌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과 소명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게 되는데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된다는 뜻입니다.
‘도시’가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는 곳이라면 ‘광야’는 그런 것 없이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에게서 왔고 또 하느님의 소명을 따라야 한다고 정해진 요한. 그는 사춘기를 겪었을까요?
저는 안 겪었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사춘기를 겪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안 겪은 것처럼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사춘기의 자녀를 둔 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아이도 키워보지 못한 저에게 많은 것을 물어옵니다.
물론 그들도 제가 어떻게 대답할지 뻔하게 알면서도 그저 답답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춘기 아이들을 잘 이해하는지부터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의 성장이 빨라져 중2병이라 하지 않고 초4병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그저 엄마가 무슨 말만 하면 짜증이 나서 문이 부서지라 닫아버리고 자꾸 야동을 보고 게임에 중독되며 공부, 진로,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항상 우울해하며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버리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사춘기의 특징일까요?
‘이유 없는 반항?’ 이유 없는 것은 없습니다.
이유를 모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유를 몰라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뿐입니다.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10대, 사춘기가 지난 20대 대학생, 그리고 30대 직장인이 실험에 참여했습니다. 
자동차 운전게임입니다.
결승전에 일찍 도착할수록 보상이 커지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노랑 신호등이 나옵니다. 노랑 신호등은 멈추어야 할지 빨리 지나가야 할지
애매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교통법상 노랑 신호등은 멈추라는 의미입니다.
노랑 신호등에 멈추면 3초가 더 걸리고 만약 무시하고 지나다가 사고가 나면 6초가 더 걸리게 해 놓았습니다. 
 
과연 이 게임에서 사춘기 아이들이 결승점에 더 빨리 들어가려고 신호등을 무시하였을까요? 결과는 예상 밖입니다.
노랑 신호등을 가장 잘 지킨 사람들은 10대 사춘기였고 그다음이 20대 대학생, 그리고 가장 지키지 않은 사람이 30대 직장인이었습니다.
통념과는 달리 사춘기 청소년들은 지킬 것은 지켜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아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춘기 아이들이 제멋대로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 실험에서 증명됩니다. 
이번에는 각 또래가 지켜보는 가운데 같은 게임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10대가 노랑 신호등을 무시하는 경우가 20% 증가했습니다.
친구들이 지켜볼 때는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무모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 실험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춘기 아이들은 어떤 결정을 할 때 주위 관계에 따라 휘둘린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없다는 말일까요? 정체성이 약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사제라는 정체성이 명확하면 주위의 유혹이 있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가장이요, 엄마라는 정체성이 명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피츠버그, 버클리, 하버드 대가 공동으로 벌인 한 실험에서 사춘기 아이들에게 어떤 소리를 30초간 들려주었더니, 아이들의 뇌가 멈춰버리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부정적인 영역은 활성화되고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긍정적인 영역은 축소해버리는 그야말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게 만드는 그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부모의 목소리’였습니다. 
             
  [참조: ‘청소년 사춘기, 반항의 이유’, 유튜브 채널, ‘EBSCulture’] 
 
사춘기 때 부모의 목소리는 극도로 싫어하지만, 자신이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지 몰라 친구에게 휘둘리고, 게임이나 야동, 혹은 자기 속에 파묻히는 등,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겪는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 사춘기는 부모의 자녀로서 부모의 말만 따르면 된다고 믿다가 이젠 부모가 자신의 원천이 아님을 깨닫고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가?’의 혼돈에 빠지는 시기입니다. 
 
이때 어차피 먹히지도 않을 부모의 충고는 아이들에게 반항심만 유발할 뿐입니다.
아이의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제 주님께 돌려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세례이고 유태인들처럼 정식적으로 첫영성체 때 이뤄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부모가 어떻게 아이들의 사춘기를 지나게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바로 ‘세례’를 주며 ‘새로운 이름’을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준다는 뜻입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마치 자신의 피조물처럼 놓아주지 않는다면
자녀는 언젠가는 사춘기를 크게 한 번 겪게 됩니다. 
 
부모에게 절대 순종만 하던 착한 딸이 대학교에 들어가서 갑자기 아침에 걸을 수 없게되어 휠체어를 타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이름 모를 병이 생기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자신을 놓아주지 않은 부모에 대한 반항입니다. 
 
혹은 결혼해서도 성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늦게서야 동성애자로 변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혼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춘기를 겪지 않으면 한 번은 이렇게 크게 겪게 됩니다.
모양새만 다를 뿐 정체성 혼란의 사춘기를 겪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다행히’ 저를 놓아주셨기에 저는 사춘기라는 것을 눈에 보이게는 겪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7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기에 7살 때부터 사춘기를 조금씩 겪었습니다. 
‘그럼 나는 어디에서 왔고 나는 누구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 TV에서 ‘슈퍼맨’이 나왔습니다. 
‘그래, 나도 그럼 슈퍼맨처럼 외계에서 온 것이 확실해!’
그때는 하늘을 나는 슈퍼맨 꿈만 꾸었고 실제로 날아보려 하다가 배가 바닥에 갈려 까진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날지 못하는 것은 내가 슈퍼맨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방법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성당에 처음 나가서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슈퍼맨 놀이를 그만두었습니다.
나의 원천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저는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춘기는 분명 있습니다. 작게 겪느냐, 크게 겪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부모가 얼마나 빨리 아이의 이름, 곧 본성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자녀들에게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춘기를 겪었을까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춘기는 한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므로 자주 이것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빠르게 사춘기는 지나가겠지만 이 작업이 늦어지면 모두에게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광야’에서 살게 해 주어야 합니다.
광야까지 인도해주지 않은 부모는 도시에 사는 아이의 고통을 함께 겪어야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자녀를 광야로 이끄는 부모가 됩시다. 
주님과 1대1로 사는 곳이 광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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