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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1일 -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6-21 조회수 : 2892

내 안에서 이웃에 관한 판단이 멈추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도 산상설교의 내용 중 하나입니다.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집약체입니다. 
처음 ‘하늘 나라의 행복’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행복에 이르려면 ‘사랑의 계명’일 지켜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계명은 당신께 대한 믿음 없이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심판하지 않게 될까요?
우선 그리스도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율법이든 그리스도 없이는 지켜질 수 없습니다. 
 
영화 ‘세븐’(1995)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임신한 당신의 아내를 질투라는 이름으로 죽인 그 사람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데 당신은 그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살인범은 ‘칠죄종’의 순서대로 사람들을 죽이며 세상의 죄가 만연해 있음을 경고하려 합니다.
돈만 아는 변호사를 죽이고 게으르고 교만하고 먹기만 하는 사람도 죽입니다.
 
범인은 형사와 그 아내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질투’를 느낍니다.
그리고 마지막 ‘분노’를 느끼는 사람에게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범인은 아내의 머리만 박스에 넣어서 형사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아기까지 있었다고 말합니다.
형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법을 어기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판단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판단하며 미워하며 살고 싶겠습니까? 판단을 멈추는 것이 안 되고 용서하는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렇다면 남을 심판하지 않게 되는 것에서의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바로 남을 심판하는 마음인 들보에 피를 발라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출입문 들보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집 안에서 먹던 파스카 예식을
떠오르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용서를 넘어서 판단 자체가 되지 않게 하려면 판단을 하는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가 발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판단하지 않으려면 내 마음이 죽어 봉헌돼야 합니다. 
 
진정으로 남을 심판하는 마음을 버리고 싶다면 그리스도께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5-16)
 
요한은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예수님의 마음은 구원하는 마음이시지 심판하는 마음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심판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성체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에게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들보에 피가 발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자신의 마음을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는 그리스도의 마음인데, 자기 마음을 지키려는 자에게 주면 돼지 목의 진주처럼 성체를 모독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특별히 누구를 미워해 본 적이 없는 어떤 마음 착한 분이 자신의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한 자매에 대해 미운 사람이 생겼을 때 도저히 용서가 안 되어 힘들었다고 합니다.
매일 미사에 나가면 계속 용서하라는 복음만 나와서 더 미칠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하루는 성체를 영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용서하기 싫어요. 예수님이 아무리 저한테 용서하라고 해도 전 죽어도 용서 안 할 거니까
저의 이 마음 드릴게요. 예수님께서 제 마음 받으시고 예수님이 용서하세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음 날부터 그 자매와 마주쳤는데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화도 안 나고 분노도 안 생기고 ‘용서해야 하는데’ 하는 분심도 안 생기고 그냥 평화롭고 그 자매가 싫지도 않고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용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거구나!’
 
예수님 마음은 심판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용서하려고 한다는 말은 이미 심판했다는 말입니다.
이미 심판을 내려놓고 무슨 용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을 지니고 심판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뱀이 무슨 용서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죄를 짓게 하고 그 죄를 감추고 합리화하기 위해 타인을 심판하게 만듭니다.
나의 본래 마음은 하느님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성상 심판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마음을 봉헌하고 그분의 마음을 장착하지 않는 한 내가 용서하려고 하는 노력은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심장을 찾아 나선 양철나무꾼이 저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항상 저의 차가운 마음을 따듯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철나무꾼은 오즈에게 이미 따듯한 심장이 생겼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사랑의 심장이 이미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피로 우리 마음을 죽이시고 성체로 들어오셔 우리 마음이 되십니다.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판단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하고 성체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따듯한 마음을 장착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구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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