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는 법: 먼저 생존을 보장받아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전작업으로 이웃을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심판하게 되면 분별심이 생기고 그러면 선인과 악인에게 공평하게 대해주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 판단이 일지 않아야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일단 판단하여 분별심이 생기면 선인과 악인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요?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웃이 친구인지 적인지 분별하지 않으면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내가 ‘정글’ 속에 살고 있음을 증명해줍니다.
정글에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글은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 부인이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왔는데 돌연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괜히 불안했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퇴근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창문에 쇠창살까지 붙어 있겠다, 아파트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까지 있어.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러나 불안증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TV나 신문기사에서 안 좋은 것을 읽고는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아 떨렸습니다.
상상에 상상을 더하고 불안에 불안을 더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콜택시를 불러 아기와 함께 30분 거리의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너 왜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다녀?”
그녀는 모든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 나돌아다니면 못 써. 어서 돌아가.”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마저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자 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보호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가에 내려 아기를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한 시민의 도움으로 그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숨지고 말았습니다.
[참조: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21세기 북스]
이 어머니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자신과 아기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에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세상은 정글입니다.
내가 아니면 나와 아기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모든 사람을 분별하게 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원수가 생기는 이유는 그가 무언가 잘못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나를 정글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용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정글은 정글입니다.
정글에서 원수가 생기지 않으려면 정글보다 강하게 나의 생존을 보존해 줄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원수가 생기지 않고 용서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아프리카에 파견된 선교사가 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머리를 숙여라. 무릎을 꿇어라.
기어서 아빠에게 와라. 이제 일어서라. 잘했다 아들아.”
아들이 오는 길 위의 나무에 독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그대로 따릅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지금 정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보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자녀는 무엇이 위험한지 분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믿으면 독사는 그냥 독사일 뿐 원수가 아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어야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이유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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