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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7일 -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6-07 조회수 : 2905

불행의 원인을 없앤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진복팔단’이라 불리는 예수님의 행복선언입니다. 
행복에 관해 이야기한 수많은 스승이 있고 수많은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처럼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완전하지 않은 행복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말씀해주시는 참 행복의 길인 진복팔단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전한 행복의 길임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에 관해 인간으로서 가장 완전한 단계까지 갔던 분이 부처가 된 싯다르타입니다. 
그는 왕자로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 나의 욕망과 집착임을 알아내었습니다. 
 
마를린 먼로가 다 가지고도 약물 과다복용으로 목숨을 잃고 또 다 가졌다고 여겨지는 헤밍웨이도 자살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가지지 못해서 불행했던 것이 아니라 욕구가 너무 커서 불행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집착임을 깨닫고 그 집착의 원천인 자신을 비우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욕구를 버리는 이들은 집착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의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의 원인이 자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더 나아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고통의 원인임을 깨닫는다면 슬픔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탓이요!”를 하면 타인이나 상황에 대한 화가 줄어들고
온유하게 됩니다. 
그러니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가 됩니다. 
 
그런데 부처의 가르침은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진복팔단은 뒤로도 몇 개가 더 이어집니다. 
실상 고통의 원인인 자기 자신과 집착을 없앰으로 행복에 이르려 하는 방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차피 ‘나’로 살아가는 이상 집착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어떤 분이 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목은 모르겠습니다.
티베트에서 한 스님이 1년간 동굴에 갇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명상 수행을 하였습니다.
1년 뒤 다른 스님들이 동굴의 문을 열자 머리카락과 손톱이 길게 자란 명상상태의 한 남성을 발견합니다. 
 
다른 스님들은 그를 들어 마차에 태우고 돌아갑니다. 하도 오래 그 자세로 있어서 몸이 굳어있습니다. 
절로 돌아가서는 그의 머리카락도 자르고 손톱도 잘라주며 몸을 주물러 펴 줍니다.
그러자 사람이 명상상태에서 되돌아와 생명을 되찾습니다. 
이렇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자기를 죽이는 것이 결국 최초의 불교 수행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에 생명이 돌아온 그 사람은 이내 들을 수 있게 되고 냄새를 맡게 되고 볼 수 있게 됩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한 여인의 방울 소리는 이내 욕망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과 더 많은 쾌락에 빠져듭니다. 극단적으로 자기를 끊을 줄 알았던 그 스님은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욕망으로 빠져든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정확한 줄거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영화는 만약 누군가 살아있다면 욕망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괜히 그것을 이기겠다고 자기 힘만으로 노력하다가는 낭패만 봅니다. 
이런 이유로 대승불교에서는 비우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자비심, 즉 불성을 깨우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가르치게 됩니다.
 
비우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양심을 일깨워 그 비워진 곳이 다른 욕구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불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로 말하면 사랑이요 성령이 됩니다. 
 
해적선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살면서도 다른 욕구를 지닌 존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로움이라 합니다.
자기 욕망을 버리는 만큼 의로움으로 채우고 싶은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욕망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이 때문에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는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역시 그 사랑을 받아들이려면 자기를 죽여 밀떡과 포도주처럼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끗함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욕구를 버리려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본성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진복팔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입으면 하느님처럼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자기를 봉헌하여 성체가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바로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모두가 다 자기 먼저 살겠다고 하는데 자신이 희생하면 모두가 배부르게 되므로 평화가 이룩됩니다. 
이 때문에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박해도 각오해야 합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행복과 반대로 나가는 그리스도를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지막에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진복팔단이 말하는 참 행복은 ‘군고구마’가 되는 삶입니다. 
내가 죽고 타인에게 양식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의 십자가상 봉헌과 함께 우리의 양식과 음료가 되는 삶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에게 인사하러 가시는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당신 죽음이나 박해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엘리사벳에게 양식이 되기 위해 가시는 성모 마리아는
당신 태중에 예수님을 모시고 계시기 때문에 최초의 성체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상황 속에서 마니피캇의 찬미를 통해 참 행복을 표현하십니다. 
 
저는 나름대로 군고구마의 삶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먹히려면 일단 구워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구워지기 위해 나를 봉헌했으니 나의 지상에서의 행복은 없습니다. 
다만 먹힐 때 행복합니다. 누군가의 입맛을 당기고 배를 부르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에 응한다면 참 행복을 완전하게 아셨던 분이 지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알려준 진복팔단만큼 완벽한 행복의 길잡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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