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감당할 수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청하는 것, 자유!
예수님께서는 오늘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일 수 없음을 밝히십니다.
그 이유는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내 주님’으로 불렀다는 성경 말씀 때문입니다.
당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란 뜻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고 구원자시란 뜻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을 다윗의 후손이라는 명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명칭을 통해 당신을 정서적 노예로 만들려는 세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의 후손은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다윗의 후손이 되면 사랑해 주겠다고 예수님을 꼬드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정서적 노예 생활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이를 위해 당신이 다윗의 후손이 아님을 밝히어야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자신들에게 필요가 없어진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그들의 애정에 묶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이 정서적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도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삼으려 합니다.
“당신은 내 남편이야!”, “너는 내 자녀야!”, “우리 가문은 그래서는 안 돼!” 등으로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그런 노예 생활하는 것을 즐깁니다.
이를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73년 8월 23일부터 28일까지 6일간 스톡홀름에서 은행 강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강도들이 4명의 직원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였습니다.
재판정에서 4명의 인질범은 모두 은행강도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심지어 강도들의 편을 들었습니다.
자신들을 해치지 않은 것에 오히려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강도들과 지내면서 애착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스톡홀름 증후군’이라 합니다.
이런 현상은 꼭 인질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는 아내나 학대받은 아이들이 남편, 아버지를 옹호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런 심리적 현상 때문에 독재자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깨끗한 ‘아리아인’으로 독일인들을 묶으며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영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1993)에서는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 팔다리를 자릅니다.
그런데 그녀의 애인이 이것을 알고 그 남자를 죽이려 할 때 여자는 자신의 팔다리를 자른 남자의 편을 듭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심리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심리가 있습니다.
이런 심리가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인간은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소속되기로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혹은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면 그 공동체를 지배하는 법을 따르면 그만이라 자유로운 선택에 대한 부담이 줄어듭니다.
인간은 자유를 부담스러워서 해서 어떤 법이 지배하는 곳에 소속됩니다.
그러나 곧 자신의 팔다리를 다시 찾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벗어나 다른 무언가에 자신의 자유를 맡깁니다.
어떤 분이 부모가 하도 싸우고 해서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 결혼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사는 게 별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처럼 남편과 똑같이 싸우고 자녀들에게 집착합니다.
이런 식의 도망은 참된 해방을 이룰 수 없습니다.
호주 시드니의 한 교도소에 탈옥을 계획하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주방에서 일했던 그는 매일 빵을 납품하러 오는 지입차가 일정한 시간에 왔다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차를 통해 탈옥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배식이 끝나기 전 간수들의 감시를 피해 몰래 짐 싣는 곳에 탄 죄수는 잠시 후 찾아올 자유를 꿈꾸며 차가 멈추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차는 멈추었고, 죄수는 운전사가 짐을 나르는 틈을 이용해 몰래 차에서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가 도착한 곳은 다른 지역에 있는 교도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정서적 노예 생활로부터의 탈출은 이런 식입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고 이렇게 되뇌며 걷습니다.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와 헤어졌다….”
정말 엽기적인 그녀와 헤어졌다는 생각에 그는 조금씩 얼굴이 밝아지면 이렇게 기쁨의 소리를 지릅니다.
“난 자유다!”
그렇게 자신을 옭아매던 여자와의 이별을 즐깁니다. 다른 여자를 만나 술을 진탕 마십니다.
너무 즐겁습니다.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지금까지 자신과 이야기했던 여자가 치마를 걷어 올리고 소변을 보는 것입니다.
아직 수술하지 않은 성전환자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이 세상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것은 또 다른 내 자유를 봉헌할 누군가를 찾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쳇바퀴에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의 탈출은 안 됩니다.
아예 나의 자유를 나를 가장 사랑해 주시는 분께 봉헌하는 편이 낫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나를 지상의 모든 정서적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해 줍니다.
이영숙 수녀님의 책,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에서 형제들을 가문의 전통인 유교에 묶어놓으려 했던 분이 나옵니다.
교육감을 지낸 분으로서 자신의 동생들이 유교가 아닌 조상을 모르는 상것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하시던 분이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수녀님이 지나가시면 “저는 유교입니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운명 직전에 대세를 받고는 다시 살아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수녀님. 제가 유교에서 죽고, 천주교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셋째 동생은 형님이 깨어나셔서 깜짝 놀랍니다. 대세를 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전에 묶여있던 세속적인 집안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사실 그조차도 조상들의 전통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형제들 안에서 자신의 권위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자신도 노예 생활하지만, 형제들도 그렇게 노예 생활을 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며 산 것입니다.
이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길은 세례로 세상에서 죽고 하느님 자녀로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제자 중 어부들은 배와 그물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버리고 따랐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의 전통이요 나의 정서적 주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어머니를 향하여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세상의 정서적 노예 생활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자녀로서 더 수준 높은 사랑으로 부모를 사랑하였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애정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세상의 올가미에 엮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다윗의 후손이라는 멍에를 벗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으셨던 이유는 아버지의 법에 당신 자유를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모, 자신의 창조자에게 어차피 부담스러워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자유를 봉헌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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