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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3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5-30 조회수 : 2801

5월30일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오 28,16-20
 
삼위일체와 영원한 생명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와 영생(영원한 생명)의 관계에 대해서 묵상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당신께서 교회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세례받은 사람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실현되게 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실현하는 사람이고 그래야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플라나리아’란 동물이 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속에서 서식하는 평형 동물입니다.
플라나리아는 뇌, 눈, 신경관, 수정란, 난소, 창자, 입, 정소, 생식소 등을 갖춘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입니다. 
 
그런데 플라나리아는 어느 부위를 잘라도 다시 온전한 플라나리아가 됩니다.
몸통을 다섯 부분으로 자르면 다섯 마리의 플라나리아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 한 대학교에서는 한 마리의 플라나리아를 잘라서 2만 마리까지 늘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플라나리아는 영원히 사는 동물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플라나리아는 자신의 몸을 자손에게 이어주며 개체 수도 늘어날 뿐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멸종시키지 않으면 영원히 삽니다.
몸을 자른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고 그저 하나의 개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도 영원히 사는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단 플라나리아는 세포마다 눈과 머리, 창자 등을 생성할 수 있는 설계도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자르더라도 다시 온전한 모습으로 재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플라나리아를 믹서기에 갈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잘게 잘리면 재생을 할 수 없습니다.
다시 ‘원형’을 회복할 능력을 잃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길이로 자르면 플라나리아는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이 말은 플라나리아를 자르면 그와 비슷한 거머리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플라나리아가 된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플라나리아만 이런 능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플라나리아처럼 영원히 살려면 끊임없이 플라나리아로 재생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잘리지 않거나 혹은 생식하지 않으면 그 플라나리아의 생명은 거기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잘리거나 자신의 몸을 떼어 나누어주는 생식을 멈추면 그것은 영생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살과 피를 떼어 나누어주는 것, 이것을 통해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는 것,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사랑도 없고 사랑으로 태어나지 않는 생명체도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부모의 피 흘림으로 탄생합니다.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피 흘림이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는 영생이 불가능합니다. 
사랑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다 사라져도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생명체를 보며 적어도 두 개는 자신 안에 품고 있어야 함을 봅니다. 
그 첫 번째는 정체성과 원형, 혹은 설계도, 그다음은 자기 자신을 복제하거나 자신과 같은 개체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생식능력, 혹은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플라나리아는 원형과 생식능력을 담는 하나의 그릇인 것입니다.
플라나리아가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원형과 생식능력, 이 둘과 하나가 된 삼위일체의 모습을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본성적으로 영원한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하실 수 있는 원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삼위일체 신비를 품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계시’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까요?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십니다.
만약 위 플라나리아의 예와 비교하자면(물론 하느님을 저런 동물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죄송하기는 하지만)
은총과 진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원형’과 ‘생식력’입니다. 
아버지와 성령을 담으시는 그릇과 같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자동차를 만들 때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분명 ‘설계도’와 ‘피땀’이 필요합니다.
자동차가 고장 나면 설계도대로 다시 재생시킬 수 있습니다. 
설계도대로 누군가가 땀을 쏟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은총은 ‘피땀’, 즉 ‘사랑’의 에너지를 의미하고, 진리는 ‘설계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이 아니면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외아드님으로서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원형’인 ‘진리’를 품고 계신 것이고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의 에너지를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행동하고 말하고 듣고 사십니다. 
아버지의 모습대로 되려는 의지가 있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는 진리이시고 원형이십니다.
또 성령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자녀의 탄생을 위해 피를 흘리라고 종용하십니다.
세례 때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더는 당신 자신을 위해 사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탄생시키시기 위해 피를 흘리어야 하셨습니다. 
 
플라나리아가 플라나리아로서의 ‘원형’, 즉 ‘설계도’나 ‘진리’를 자신 안에 품고 끊임없이 그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또 자기의 살과 피를 떼어 나누어주며 자손을 낳으려고 하는 ‘사랑’을 지녔기에 영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비록 인간이 되셨지만, 하느님처럼 영원히 살려면 하느님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 해야 하고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어 자신과 같은 자녀를 탄생시켜야 함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부모들이나 믿음을 위해 피를 흘리신 순교자들을 볼 때
그런 희생이 생명의 끝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을 살기 위해 죽는 자만이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플라나리아라는 한 작은 생명체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란 바로 자신 안에 은총과 진리를 담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은총과 진리를 품고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 하고 살과 피를 내어주어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키려 할 때 우리 안에 삼위일체를 실현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도 당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받아들여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영원히 살기 위해 그리스도의 원형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그리스도를 닮아 하느님의 자녀를 탄생시키기 위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죽겠지만, 이렇게 죽으려고 하면 영원한 삶을 살 것입니다.
영생의 비밀은 삼위일체 사랑에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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