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엄마에게 대듭니다. 엄마가 보여주는 이제까지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너무 싫다면서 큰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
우리는 남들과 비교를 참 많이 합니다. 남들이 하는데 왜 못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남들도 다 똑같이 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다르게 살고 있으며, 다르게 살아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그런 생각 자체를 틀렸다고 말합니다.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다름 역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르게 다가오시는 주님 역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양한 모습의 주님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매 순간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기도 안에서 만나는 주님, 일 안에서 만나는 주님, 여가 활동 중에 만나는 주님, 요리할 때 만나는 주님, 아플 때 만나는 주님. 모두 다른 모습입니다.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꼭 필요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기에 우리는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모습은 이렇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변화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 안에 있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은 대사제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결탁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장사를 해서 가난한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것입니다. 이 모습에 성전 안의 상인과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가 잘못했구나.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자.’라고 생각하면서 변화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변화를 부정하니 예수님을 없앨 방법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하지 못하는 모습은 어떻게 될까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죽는 것처럼,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주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 말은 곧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 자신이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특히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변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구태의연한 옛날 모습에 안주하면서 변화하려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선택하세요.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보시라는 의미로 적어봅니다.
평소 아주 친한 두 친구가 여행하다가 외진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수풀 사이에서 반짝이는 돌을 발견한 것입니다. 금덩어리였습니다. 이 친구가 금덩어리를 친구에게 보여주자, 친구는 너무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거 금이 아닌가? 우리 정말로 횡재했네.”
그러자 금덩어리를 주운 친구가 정색하면서, “왜 우리인가? 금을 주운 사람은 날세.”라고 말합니다. 이 말로 둘의 관계는 아주 어색해졌습니다.
잠시 뒤, 금을 잃어버린 산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금을 가지고 있던 친구는 다른 친구에게 다급하게 말합니다.
“이걸 어쩌지? 저 산적들이 금을 발견하면 우리는 정말 죽을걸세.”
그러자 이 친구는 아무런 표정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라고 말하지 말게. 금덩어리를 주운 사람은 자네가 아닌가?”
욕심으로 인해 관계가 깨어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봅니다. 사실 ‘보이는 가치’보다 보이지 않는 사랑, 믿음, 평화, 우정 등이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순간적인 만족을 위해 보이는 가치를 선택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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