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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5-22 조회수 : 2677

5월22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요한 21,20-25
 
오늘을 충실히 살게 만드는 것은 꿈보다 정체성이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마지막 때에는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요한의 미래도 궁금해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요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요한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의 결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본인들도 헛갈릴 정도로 모호하게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삶의 끝을 아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만을 믿고 현실에 충실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운명론의 폐해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운명을 알고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전에 EBS 지식 채널 중 이러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파리 여행을 다큐 형식으로 찍은 것입니다. 
자녀들을 위해 평생 미술 교사를 하다 은퇴하여 이제 마지막으로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내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난 것입니다.
 
그는 오랜 계획을 세우고 많은 돈을 쓰며 그림 도구들을 사고 준비합니다. 
그러나 막상 파리에서의 화가 생활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소매치기도 당하며 돈을 다 잃습니다. 길거리에서 비도 맞으며 매일 그림을 그립니다.
그것은 기쁘지만 이미 손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서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였지만,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화가의 꿈이 그분께는 생계를 위한 수단 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너는 꿈이 뭐니?”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꼭 되고 싶은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그런 꿈을 이야기합니다. 
 
꿈이 크면 어른들은 칭찬을 해 줍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을 이루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성공한 사람 중에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살았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유재석 씨 같은 경우입니다. 
미래의 꿈보다 오늘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꿈이 오늘을 충실하게 살게 할 힘을 잃었다면 그 꿈은 망상이 되고 맙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한 스님과 제자가 가난한 집에 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가난한 집은 암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젖으로 여러 식구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다음 날 떠나면서 제자에게 몰래 그 암소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는 깜짝 놀랐지만 순종하였습니다. 
 
10여 년이 지났을 때 제자는 다시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은 이전과는 다르게 활기가 넘쳤고 부유해졌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전까지 암소에게 의존하며 살았는데 암소가 사라지자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더니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꿈도 이렇습니다. 
그 꿈이 너무나 명확하면 그것이 지금을 열심히 사는 원동력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오늘을 허투루 살게 만드는 핑계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미래에도 부자로 살 수 있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부모가 물려줄 재산에 대한 명확한 보장이 있다면 오늘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부자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미리 선언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주님은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충실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가 어떤 질문에도 머뭇거림이 없이 현명한 답을 하는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손에 참새 한 마리를 들고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 새는 살아 있나요, 죽어있나요?”
 
만약 살아 있다고 말하면 꽉 눌러 죽일 생각이고 죽었다고 한다면 하늘로 날려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스님은 대답했습니다. 
“그 새의 살고 죽음은 너에게 달렸지.”
아이는 스님의 현명함에 놀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어제 엄마가 점을 보고 왔는데 제 운명이 아주 안 좋대요.”
스님은 아이에게 손을 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재물선과 운명선 등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어보라고 했습니다. 
“네 운명선은 어디 있지?”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제 손안에 있네요.”
 
구약의 요셉이 꾼 꿈은 가족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열린 결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가족까지 존경하는 결실을 볼 것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꿈이라기보다는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면 분명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정체성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주님께서 원하셨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류시화 시인은 오갈 데 없어서 대학 때 판자촌에서 버틴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새고 심지어 떠내려갈 정도로 위에서 물이 많이 흘러내려 왔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시인이다. 이 순간은 두려워할 순간이 아니라 시를 위한 영감을 찾아내야 할 때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천둥 번개도, 바람도, 새는 비도, 흘러 내려오는 물도 모두 시를 위한 영감을 주는 소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존경받는 삶,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도록 예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오늘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나의 꿈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정체성만 명확하면 주님께서 바라시는 꿈에 반드시 도달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꿈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도록 만드느냐입니다. 
 
꿈은 모호해도 좋습니다.
자녀에게 심어주어야 하는 것은 그 꿈으로 오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게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피카소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네가 성직자가 된다면 너는 교황이 되겠지.’ 
대신에 나는 그림을 그렸고 피카소가 되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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