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9일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사랑은 생명이 꺼지는 것을 보고만 있지 못한다
오늘 복음은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포도나무는 가지에 생명을 줍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을뿐더러 말라버리고 불에 태워집니다.
하지만 포도나무인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의 수액을 받으면 그 사랑의 열매 때문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사랑하면 살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과 ‘생명’은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40일 굶어도 살지만 4일만 사랑을 받지 못해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살고 싶고, 사랑하지 않으면 살 의욕을 잃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무에서 가지로 사랑의 성령께서 저절로 흘러들어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라면 더는 성령의 수액이 공급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해야만 사랑, 즉 생명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의 본성입니다. 사랑은 생명이지만 또한 죽음입니다. 사랑하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면 자신이 먹고살 수 있는 힘들게 번 돈을 다 내어주어야 합니다.
또 아내도 남편과 아이를 사랑한다면 자신의 생존보다는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녀를 낳고 키웁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점 부모를 사랑하게 되면서 부모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 자신을 죽여갑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 저절로 생명이 흘러들어옴을, 그래서 부활할 수 있음을 믿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적은 인간들도 죽어가는 것에게 연민을 느껴 살리려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사랑 자체이신 분에게서 사랑하는 이에게 부활이 꼭 올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67년 오리건주립대학교의 찰스 괴칭거 교수는 ‘설득의 과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첫날 강의실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랄 만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강의실 맨 앞줄에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뒤집어쓴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가방 아래 두 구멍으로는 맨발이 비죽 나와 있었습니다.
괴칭거는 학생들에게 앞으로 이 학생이 검은 가방을 뒤집어쓰고 강의를 들을 것이며,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한다고 일러두었습니다.
그날 이후 학생들은 얼굴도 모르는 그 친구를 ‘블랙 백’(Black Bag)이라 불렀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블랙 백은 강의 시간마다 똑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설득을 주제로 3분 발표를 하는 시간에 블랙 백은 학생들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그냥 들어갔습니다.
그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처음에 블랙 백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어떤 학생은 우산으로 그를 찔러보기도 했고, 다른 학생은 ‘걷어차세요.’라고 쓴 종이를 등에 붙여주기도 했으며, 다른 학생은 주먹을 휘두르며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언론들이 블랙 백의 괴이한 행동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미국 전역의 기자들이 괴칭거의 강의실로 몰려들었고, CBS의 전설적 인물인 월터 크롱카이트까지 가방 속 학생과 인터뷰를 하고자 했습니다.
‘라이프’(Life)는 블랙 백에 대한 기사를 여러 면에 걸쳐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업 시작 후 몇 주가 지나자 블랙 백이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우산으로 찔러댄 학생들의 공격적인 태도가 서서히 공감과 애정으로 바뀌어갔습니다.
따돌림이 인정으로 변화하면서 학생들은 이름도 모르는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고, 함께 어울리면서 그의 정체성을 지켜주고자 노력했습니다.
괴칭거가 블랙 백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지를 놓고 투표를 제안했을 때,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갈 무렵, 강의실 밖에는 수많은 카메라들이 블랙 백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지만 인간 벽을 만들어 친구가 몰려든 기자들을 뚫고
안전하게 강의실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보호했습니다.
친구들의 선의에 고마워하며 블랙 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가방 속에 든 한 사람일 뿐입니다.”
언론과 대중은 괴칭거의 학생들이 얼굴도 모르는 친구를 좋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심리학자들의 설명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에 대해 누구도 속 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출처: 『지금 바로 써먹는 심리학』, 2. 최고의 사랑을 위한 심리학의 조언, 리처드 와이즈먼, 웅진 지식하우스]
반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블랙 백을 왜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사랑을 지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면 죽어가는 것에게 연민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주려고 합니다.
뉴스에서 개가 사람이 박스에 넣고 밀봉하여 죽어가는 새끼 고양이들을 다 물어와서 살리려고 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낳은 새끼도 아닌 고양이를 살리기 위한 본능이 개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분명 살아있는 것은 죽어가는 것에게 연민을 느끼고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줍니다.
덴젤 워싱턴 주연의 ‘존 큐’란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들이 심장 이식을 하지 않으면 곧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직장에 다니는 아버지의 보험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병원을 점거하고 자신의 심장으로 아이를 살리려고 합니다.
아들은 아무 생산능력도 없는 어린아이입니다.
다만 자신이 창조한 생명이기에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고라도 아이를 살리려는 노력이 공감될 수 있습니다.
짐승도 그렇고 사람도 그러할진대, 하느님께서 어찌 그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은 받아야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절대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사랑하는 존재들, 즉 동물들이나 인간들이 생기기 이전에 이 생명들에게 사랑할 수 있게 만들 사랑이 먼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 사랑이 생명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죽어가는 것에 연민을 느낍니다.
히틀러나 빈 라덴과 같이 남을 해치려는 열매가 아닌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죽어가는 것에게 반드시 다시 사랑과 생명을 넣어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다 죽은 이들의 부활의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행복하십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한 점도 팔리지 않는 그림을 하루에도 몇 점씩 멈추지 않고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 창조에서 느끼는 행복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이 고통스러워도 또 낳는 것은 창조의 기쁨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가지에서 사랑의 열매가 많이 맺힙니다.
그렇다면 농부는 그 가지가 손상되지 않게 잘 가꾸며 생명을 유지시켜 줍니다. 이것이 창조자의 기쁨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살리시며 기쁘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 위해 죽읍시다. 마음껏 죽어도 됩니다.
사랑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사랑하여 죽을 수 있다면 그분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자는 사랑 자체이시기에 창조하고 살리고 부활시키는 행복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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