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5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요한 15,1-8
행복을 추구하는 세 가지 다른 모습과 그 결과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어제 복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교회를 위한 성령을 받으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늘로 가야 함을 밝히신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다음 말씀입니다.
당연히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았으면 이젠 당신의 자녀에게 주어야 할 차례입니다.
물론 가지처럼 당신께 찰싹 붙어있는 자녀들만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삼위일체의 원리가 아버지나, 당신이나, 교회에게 참 기쁨의 방법이요 원천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래서 기쁨의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어머니처럼 아버지의 기쁨을 자녀들에게 내어주는 중개자 역할을 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도 역시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생각하면 쉬워집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께로 향하여 성령을 얻어내 당신 자녀인 교회에 공급해 주십니다.
그때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우리도 그런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어머니가 그런 기쁨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엄마가 자녀를 통해 추구할 수 있는 기쁨의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녀를 통해 자신이 기뻐지려는 시도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것을 자녀에게 내어줌으로써 추구하는 기쁨이며, 세 번째는 남편에게 받은 것을 자녀에게 주며 행복한 경우입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자녀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아주 짧은 행복은 맛볼 수 있지만 오랜 목마름과 결국엔 자녀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 예는 제가 자주 쓰는 “평생 내가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의 경우입니다.
옛 시골의 어머니는 맏이를 극도로 사랑하여 그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잘 성장하여 좋은 대학에 나오고 좋은 집 처녀와 혼인하였습니다.
맏이이기 때문에 어머니를 모셔야 했지만, 아내는 어머니를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아내를 죽게 한 어머니를 더는 볼 수가 없어서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않겠다면서 서울로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평생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니?”라며 섭섭해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아들만을 위해 사신 것일까요, 아니면 아들을 통해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사신 것일까요?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녀를 희생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는 언제까지 어머니의 희생양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어머니는 언젠가 값을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나의 것으로 자녀를 행복하게 하려는 엄마입니다.
자녀만 행복하면 된다고 믿지만, 자신의 것으로 자녀를 행복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기쁠 수 없는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것으로 누구를 행복하게 한다는 말은 내가 하느님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만족시켜 줄 자녀는 없습니다.
어느 호스피스에 관련된 동영상에서 한 딸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는 홀로 저희 4남매를 잘 키우셨어요.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희 모두는 잘 성장했고 모두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어머니에게 ‘엄마, 살아오시며 언제가 제일 행복하셨어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행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그렇게 슬프더라고요.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으셨다고.”
자식 처지에서 어머니가 행복한 적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미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효도를 하지 못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하나같이 효자 효녀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어머니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을 자녀에게 주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처럼 되어버려 그 어떤 것에서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행복은 겸손한 이의 몫입니다.
그래서 나의 것을 내어주며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오늘 복음과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사랑받아 얻은 것을 자녀에게 주어 자녀가 행복하도록 성장시키는 어머니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얻은 성령을 성모님에게 주시고, 성모님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성령을 교회에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우 어머니는 자신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기에 겸손해질 수 있어서 자녀의 작은 감사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나의 것을 준 것이 아닌데도 감사해하니까 오히려 그런 감사를 받는 것이 미안합니다.
일본 영화 ‘도쿄타워’(2007)는 술주정뱅이에 한량인 남편을 떠나 홀로 고생하며 아들을 키운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닮아 한량 같은 아들을 잘도 키워내어 어엿한 직장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암에 걸려 죽게 됩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를 한 번 만나게 해 드리려고 아버지에게 연락합니다.
아들에게 남편이 병문안 온다는 소식을 들은 에이코는 자신의 절박한 상황도 잊어버린 채, 남편을 맞을 준비에 분주합니다.
미용사인 아들 친구에게 부탁해 머리카락을 다듬고 립스틱으로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목에는 스카프까지 두릅니다.
그리고 침대에서 무릎을 꿇고 남편을 맞습니다.
병실에 둘이 남겨졌을 때 남편은 발모제 덕분으로 머리카락이 나왔다는 뜬금없는 말을 하고 에이코는 거기에 맞장구를 칠 뿐입니다.
남편에 대한 원망도, 홀로 아들을 키웠다는 공치사도, 그래서 지금 항암치료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남편의 병문안이 얼마나 황송한지 몸 둘 바를 모릅니다.
둘이 매점에 내려가 무언가를 살 때의 대화 내용입니다.
“뭘 그렇게 많이 사세요.”
“당신만 먹나, 먹을 사람이 많잖아.”
“그래도 미안하게(스미마셍).”
“이것도 사.”
“이리 주세요(스미마셍).”
“자!”
“에구, 됐다니까요. 자꾸 미안하게(스미마셍).”
“이것도, 이것도.”
“고만 사요(스미마셍).”
일본어로 ‘스미마셍’은 이렇게 다양하게 쓰이는 것 같습니다. 미안하고 고맙고, 뭐 그런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평생 아이 키우는데 하나도 협조를 하지 않은 남편에게 뭐가 그리 미안하고 감사할까요?
여자 처지에서 본다면 화가 머리끝까지 날 상황입니다.
하지만 저는 조심스럽게 이런 겸손이 있어서 아들의 효도에도 행복할 수 있었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혼자 키웠지만 그래도 자신만의 힘으로 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작은 감사에도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요즘 그런 행복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복음 묵상을 올려주어서 도움이 되었고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어주어야 해서 저도 묵상하게 되어서 사실 저에게 더 좋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내어주는 것이기에 제가 주는 모든 것은 본래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고마움에는 제가 황송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쁨은 이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좋은 것을 주며 성장시킬 수 있는 어머니입니다.
참 기쁨을 누리려면 그리스도처럼 주님께 붙어있으며 그분으로부터 받아 자동적으로 얻은 열매를 이웃들에게 나누어줍시다.
나의 것을 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것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 덕분에 행복하고, 또 주님의 것을 내어주기 때문에 겸손해져
작은 감사에도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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