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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4-29 조회수 : 3042

사랑하면 왕과 종이 생긴다. 그래서 행복해진다. 
 
오늘 제목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평등한 두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부부가 협의하듯 함께 동등하게 나아가는 것이라고 여길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하느님이시기에 인간이니까 순종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왕직’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면 왕과 신하만 생길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종이 되어 순종하여야 하고 파견받아 소명을 완수해야 하는 게 왜 행복일까요? 
 
많은 개신교 교파는 목자를 장로들이 투표로 결정합니다.
대통령을 뽑는 것과 같습니다.
싫으면 있던 사람을 내보내고 다른 목사를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라고 해서 왕정을 실천하는 부탄과 같은 나라보다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부탄이 행복도에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습니다.
평등한 것보다 순종하는 주종관계가 더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쉬울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 복이 없으면 남편 복도 없고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
 
만약 누군가 고아로 자랐다면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배울 수 없을까요? ‘순종’을 배울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순종할 수 없다면 남편의 사랑에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합니다.
당연히 사랑을 받지 못하여서 자녀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사랑을 채우려고 하기에 자녀들은 이용당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녀들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여 나의 교만을 꺾어 순종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분이 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부모에게 반항하여 미국을 떠나 아프리카로 온 청년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같은 또래의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어느 날 그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청년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릎을 꿇어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곧바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미국 청년은 아들에게 그렇게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기어서 내게로 오너라.”라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포복으로 아버지를 향해 갔습니다.
미국 청년은 그런 가부장적인 모습에 자신의 부모를 떠올리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일어나라.”라고 하며 아들을 안아주었습니다.
아들은 자신 머리 위에 있었던 나무에 매달린 커다란 독사를 보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미국 청년은 그제야 알았습니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라는 것을.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사랑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것임을. 
 
순종할 대상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가요? 예수님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유다를 꼽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직후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이 주님이요 스승으로서 발을 씻어주었으니 가서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발을 씻겨주어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순종하게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가스펠 헤럴드지에 게재되었던 이야기입니다. 
세실 씨는 어느 날 그의 사랑하는 어린 딸의 방으로 갔습니다.
딸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준 아름다운 구슬 상자를
아버지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구슬이 아주 예쁘다고 감탄을 하고 나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얘야, 그것을 불 속에 던져버려라.”
 
어린 소녀는 잠시 당황하고 망설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계속 말하는 것입니다.
 
“네게 강요하지는 않겠다. 너에게 맡기겠다. 이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나를 믿는다면 그렇게 해라.”
어린 소녀는 고심하다가 결국 순종하기를 택하고 그 상자를 불 속에 던졌습니다.
그 일 후 어느 날 아버지는 그녀가 오랫동안 갖고 싶어 하던 훨씬 더 아름다운 구슬 상자를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아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신뢰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였단다.
너의 인생에 있어서 하느님은 여러 차례 네가 이유를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릴 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그때 네가 나를 믿었듯이 하느님을 믿는다면 너는 언제나 그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흐릅니다.
그래서 나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은 항상 나의 하느님이 됩니다. 이것이 왕직의 특성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은 권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해주셨기에 그분이 나의 왕이요 주님이요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파견받습니다. 그분께 순종하면 우리는 그분을 품에 안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을 받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게 된다는 말은 그분 뜻을 실천한다는 말이기에 파견받는다는 뜻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순종하여 누군가의 뜻을 따르고 있고 그분이 나를 사랑해주신 분이라면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순종으로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보내주신 우리가 순종해야 할 대상은 부모입니다. 그리고 교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제자를 뽑을 때 자신의 말대로 배추를 거꾸로 심고 온 사람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순종은 사랑받았다는 증거이고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좋은 이유는 나를 순종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나의 교만이 고통의 원인인데, 나를 버리고 순종하게 해 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러나 순종은 사랑을 믿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음을 믿읍시다. 그러면 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자발적 순종은 사랑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행복하다는 증거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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