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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4-26 조회수 : 2909

자녀를 세례명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 이름 안에 방향이 있기 때문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목자가 아니라 ‘문’이라고 하십니다.
양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안전한 풀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양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앞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이름을 아시는 이유는 당신께서 우리 이름을 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름이 바로 세례명입니다. 
 
세례명은 다른 목소리에 휩쓸리지 않고 그 이름을 지어준 분께로 나아가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죄의 유혹에 흔들리더라도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지만,
이름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유혹에 쉽게 흔들립니다. 
나침반이 없는 배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노는 아이들은 어머니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는 어디로 나아갈지 명확하게 압니다.
그러나 이름이 없다면 아무에게나 끌려갑니다. 
 
요즘 연예 뉴스 중 ‘서예지, 김정현 노예처럼 조종’이란 기사 제목이 있습니다.
읽어보니 서예지와 김정현이 사귈 때 서예지는 김정현을 노예처럼 조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출연하는 드라마에서 스킨십을 다 빼고 여배우 앞에서는 나무토막처럼 행동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김정현도 상대역 여배우를 민망할 정도로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대했고 드라마 감독에게는 멜로 로멘스를 싹 지워달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결국, 드라마는 산으로 갔고 김정현은 건강상 이유로 중도하차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사는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사람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사적인 관계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준 일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김정현은 극 중에서의 자신의 역할보다 애인과의 관계 때문에 더 휘둘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혹에 많이 휘둘리고 죄에 떨어짐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무엇을 잊었기 때문일까요?
자신의 이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머니가 부르는 이름을 듣는다면 놀다가도 바로 집으로 달려갑니다.
이름 안에는 이렇듯 ‘방향’이 들어있습니다.
그 이름을 지어준 부모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나의 이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김정현은 극 중에서 받은 이름보다는 애인이 불러주는 이름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자신이 가진 이름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정해준 부모의 목소리를 듣고는 바로 그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세례 때 우리 이름을 정해주시고 우리가 유혹에 휩쓸리지 않도록 쉬지 않고 당신 쪽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따라서 내가 세례명만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도 세상 유혹에 휩쓸리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혹은 유혹에 빠져 죄를 짓더라도 다시 그분을 향해 고개를 들고 바른길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2016)은 이름이 곧 삶의 방향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일본 시골에 사는 한 여학생과 도쿄에 사는 한 남학생은 마치 꿈을 꾸듯 서로 몸이 뒤바뀜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어느 순간 이후 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쿄에 사는 남학생은 자신과 몸이 뒤바뀌었던 그 여학생을 찾아 꿈에 본 시골 마을을 찾아 나섭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 마을에 도착해보니 마을은 3년 전에 유성이 떨어져 폐허가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죽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도쿄에 사는 남자는 여자보다 3년 이후의 시간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유성이 떨어지는 정확히 3년째 되는 날 한 번 더 꿈을 꾸게 됩니다.
둘은 꿈속에서 서로 만납니다.
남학생은 여학생에게 바로 오늘 그 마을에 유성이 떨어질 테니 빨리 사람들을 피신시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꿈을 깹니다. 
 
여자아이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뛰어 내려갑니다.
그런데 마치 아침에 꿈의 기억이 사라지듯이 정말 빠르게 자신이 왜 뛰고 있는지 잊어버립니다.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은 기억나는데 그 누군가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때 비탈길에서 넘어져 떼굴떼굴 구릅니다.
옷은 찢어지고 무릎과 머리에서는 피가 흐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가 왜 뛰고 있지…? 아! 그 아이…. 그런데 그 아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남자아이는 여자아이 손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두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이것을 기억하고 손을 펴 손바닥을 쳐다봅니다.
“나 너 좋아해!”
 
이름을 써 준 것은 아니지만 왜 자신이 그렇게 피멍이 들어가면서까지 마을에 가서 모두 피신해야 산다고 소리쳐야 함을 기억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삶의 의미이고 이유입니다. 
 
소녀는 다시 일어나 아버지와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피신하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믿지 않던 모든 사람이 그 소녀의 확신에 기가 눌려 피신을 하게 되고 다행히 그날 밤 그 마을에서는
사망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여자아이는 도쿄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남학생과 마주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부모가 사랑해서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우리에게 당신 이름을 주셨습니다.
저는 세례명이 ‘요셉’입니다.
누군가 그 이름을 불러줄 때 죄를 짓고 있었다면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어준 분의 뜻으로 다시 돌아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자녀에게 세례명을 불러주는 것은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자녀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자녀를 주님께 나아가게 하고 싶다면 세례명을 불러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마리아야!” 하실 때,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알아본 것처럼 자녀들도 자신의 세례명을 들으며 주님이 이끄시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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