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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4-25 조회수 : 3197

왜 목숨을 바쳐야만 사랑받는가? : 사랑의 값은 생명이기 때문에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 곧 성소 주일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착한 목자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위해 그리스도처럼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삯꾼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우면 양들을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런데 만약 목숨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아드님을 사랑하지 않으실까요?
부모는 자녀가 잘났건, 못났건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꼭 아드님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조건으로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어떤 관계에서든 ‘사랑의 값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사려면 돈을 내야지 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도 오직 생명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다면 곧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태국의 공익광고입니다( 
 
한 남자가 길을 걷다가 물벼락을 맞습니다.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피해갈 수 있도록 그 물이 떨어지는 곳에 화분을 놓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는 중 손수레를 끌기가 힘들어 보이는 아주머니를 도와줍니다.
 
음식을 먹는데 낯선 개가 배가 고픈 표정으로 이 남자를 바라봅니다. 
이 남자는 본인 먹을거리의 반을 내어줍니다.
식당 가게 주인은 이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그 남자가 다시 길을 가는데 가난한 어머니와 딸이 ‘학교에 가게 해 주세요!’라는 푯말을 놓고 구걸합니다.
남자는 지갑을 꺼내 보지만 돈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비록 적지만 소중한 돈을 두 모녀에게 기꺼이 내어줍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웃집 할머니의 집 앞에 바나나를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는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 같은 친절을 베풉니다. 
 
광고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매일매일 이런 친절을 베풀고 이 남자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주위 사람들은 그런 친절을 베풀며 자신은 가난하게 사는 이 남자를 탐탁지 않게 쳐다봅니다.
광고는 가난한 식탁에 앉아 혼자 외롭게 밥을 먹는 이 남자를 비춰주며 이런 결론을 내어줍니다.
 
“그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 부자가 되지도 않을 거다. TV에 나와 유명해지지도 않는다.”
 
그는 손수레를 밀어주며 아주머니와 한바탕 웃습니다. 힘들지만 같이 웃을 사람이 있습니다.
길을 갈 때는 친구처럼 개가 따라와 줍니다. 구걸하던 어린 소녀가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소녀는 교복을 입고 서서 수줍은 듯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어느새 이 가난한 남자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릅니다. 바나나를 받은 할머니는 그를 따듯하게 안아줍니다.
그리고 그가 물이 흐르는 곳에 놓은 화분은 꽃을 피워 나비가 쉬게 합니다. 
 
광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며 끝납니다.
 
“대신 그가 얻은 것은 이러한 감정들입니다. 행복을 보게 되고,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사랑을 느낍니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얻습니다.
먹이로 빵을 받은 개는 남자를 따르고, 놓아둔 화분에서 꽃이 피어나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소녀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고, 리어카상인 아주머니는 그런 온정으로 활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당신은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나요?”
 
사랑으로 받는 감동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생명입니다.
밥은 40일을 굶어도 살 수 있지만 사랑은 4일만 굶으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도 죽고만 싶었던 주인공이 참사랑과 이해를 받게 되고는 다시 살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참으로 사랑받을 때 진정으로 죽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이렇게 생명이기에 사랑을 사려면 생명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면 내가 그 사랑을 사기 위해 나의 생명을 지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으면 생명이 올 수 없습니다.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사랑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제든 수도자든 평신도이든 내 생명을 내어주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추구하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상처만큼 하느님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유튜브에 ‘흙 묻은 아이’(https://www.youtube.com/watch?v=URQJA...​ 공익광고가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옵니다.
아이는 옷과 몸에 진흙이 묻어있습니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보며 속상해하고 화를 냅니다. 장난을 치다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실험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가 수레를 끌다가 바퀴가 빠져 진흙에 물건들이 떨어집니다.
그때 지나가던 아이는 할아버지를 도와주다가 옷에 흙을 묻힌 것입니다.
이것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엄마가 아이를 만나는 장소에서 틀어줍니다.
이 광경을 보고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옷에 흙이 묻지 않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오히려 속이 상합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할아버지를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몸에 흙이 묻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자녀들이 자랑스러워 뽀뽀 세례를 퍼붓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로 컸다는 것은 어머니에게도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라도 이렇게 부모에게 영광을 줄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부모라도 더 예쁜 자녀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녀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만큼 사랑을 위해 더 죽을 줄 아는 것을 배운 이에게 더 가게 되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제들에게 양의 냄새가 나게 하라고 하십니다.
양의 좋은 냄새가 아닌 양을 깨끗하게 하려고 더러워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아끼는 목자는 사랑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죽는 소중함을 깨달을 때 참사랑을 받게 됩니다. 
사랑의 값은 언제나 죽음임을 잊지 맙시다.
죽음으로 비워지면 언제나 그 안에 사랑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결국, 사랑과 생명은 같은 뜻입니다. 생명을 주면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면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을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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